위협받는 'ESG 대세론'..전쟁·불황에 '착한 기업'의 시대는 갔다?
“ESG는 사기다(ESG is a scam). 거짓된 사회 정의 투사들에 의해 무기화됐다.”
지난 5월 테슬라가 S&P500 ESG지수에 편입된 지 1년 만에 인권과 탄소 배출 전략 부재 등의 이슈로 제외되자 일론 머스크는 ESG(환경·사회·투명경영)를 향해 날 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단순히 지수에서 테슬라가 빠진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된 비판일 수 있다. 평소 일론 머스크의 기행을 감안하면 평범함과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반골 성향의 표출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의 발언이 아니더라도 ESG는 현재 위기다. 최근 몇 년간 무섭게 영향력을 키워온 ESG는 최근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투자 위축,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난 심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먹고살 만하니 환경과 사회 문제로 눈을 돌리던 기업과 투자자들이 진짜 위기에 직면하자 빠르게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ESG 전도사’ 블랙록의 변심
▷환경 관련 주주 제안 찬성률 반 토막
당장 ESG라는 화두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변심이 눈에 띈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기관 ISS에 따르면 블랙록은 올 상반기 투자 기업 연례주주총회에서 환경과 사회 이슈 관련 주주 제안 24%에만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상반기 찬성률이 43%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블랙록은 이와 관련 “투자한 기업들의 다음 주주총회에서 기후변화 대책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겠다”며 “과도한 기후변화 대책은 고객사들의 재무적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올해 1월 투자자 연례 서한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동참하도록 기업에 요구하는 블랙록 정책은 정치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장기적 수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는 정반대 태도로 선회한 것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연례 주주 서한에서 “화석연료 기업에는 투자를 중단하고 ESG를 투자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밝혔고, 기후변화 대응에 미흡하다는 이유로 석유 기업 엑슨모빌의 이사 3명을 교체하는 안건에 찬성표를 던질 정도로 ESG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ESG 전도사’라고 불리던 블랙록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 세계 에너지난이 심해지자 무리한 탄소중립 정책이 기업의 성장성을 저해할 수 있다며 ESG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꿨다.
그동안 ESG에 덮어놓고 찬성했던 유럽 주요국과 글로벌 투자자들도 ESG에서 빠르게 등을 돌리는 분위기다.
최근 독일을 비롯해 오스트리아·이탈리아·네덜란드 등은 석탄 발전을 늘리는 에너지 긴급 조치에 나섰다. 지난 6월 독일 대표 에너지 기업 RWE는 채굴을 중단했던 갈탄 광산 3개를 다시 가동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 가스 공급이 극도로 줄어들면서 에너지 위기가 발생하자 탄소중립에 가장 적극적이던 독일마저 퇴출 1순위였던 화석연료 석탄에 다시 손을 뻗은 것이다. 이를 두고 한 ESG 업계 관계자는 “친환경을 핑계로 다른 나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려 했던 EU 국가들이 막상 본인들이 급해지자 환경 정책부터 손절하고 나섰다”며 꼬집었다.
자본 시장 움직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각종 ESG 펀드에 유입됐던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중이다. 주가도 흔들린다. 뉴욕 증시의 S&P500 ESG지수는 8월 3일 기준 362.6포인트로 올 들어 12.53% 급락했다. 그동안 ESG 열풍에 밀려 투자 기피 대상으로 꼽혔던 방위 산업 기업과 석유·가스와 같은 에너지 산업 기업 주가가 급등한 반면 기술주 등 상대적으로 환경 친화적이라고 평가를 받았던 기업들 주가는 떨어진 결과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6월 13일 “ESG라는 용어가 나온 지 20년도 안 됐지만, 그 쓰임새가 벌써 끝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진단했다.
▶기업 ESG 경영 급제동
▷관심 식으면서 ESG 채권 판매도 급감
확 달라진 분위기에 기업들의 ESG 행보에도 제동이 걸렸다. 최근 국내 기업 사이에서는 급격한 친환경에너지 전환 목표가 기업 경영의 발목을 잡고 있어 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부는 ESG 열풍에 국내 기업들은 앞다퉈 ESG 경영을 내세웠고, ESG 펀드와 채권도 급성장했다. 그런데 올 들어 고물가와 경기 침체가 이어지자 기업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ESG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국내 기업들의 친환경에너지 전환 시점을 다소 연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무엇보다 ESG 확대에 앞장서온 유럽도 친환경 기조를 손절하고 있는 마당에 국내 기업이 전면에 나서 가장 먼저 매를 맞을 필요가 있냐는 지적이다.
실제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업종 등은 극심한 친환경에너지 전환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지난 문재인정부가 발표한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에 따르면 국내 산업권이 2050년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 규모는 5110만t에 불과하다. 이는 국내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많은 기업인 포스코가 지난해 배출한 7849만t보다도 35%나 적다. 즉 2050년에는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국내 모든 기업이 현재 포스코 대비 65% 수준으로 탄소 배출량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달성이 어려운 목표가 제시된 탓에 탄소 배출이 많은 철강 기업은 획기적으로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신기술 개발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이다. 포스코 역시 ‘수소환원제철’이라는 신기술을 개발해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다. 한국철강협회는 국내 철강 기업 전체가 수소환원제철로 설비를 전환하고 기술을 적용하는 데 총 109조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철강뿐 아니라 석유화학과 시멘트 업계도 친환경 설비투자 부담에 허덕이고 있다. LG화학, 롯데케미칼, SK지오센트릭 등은 이미 신재생에너지 산업, 수소 밸류체인, 생분해성 수지 등 친환경 설비투자에 수조원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시멘트 업계 역시 ‘2050 탄소중립’을 위한 순환자원 처리시설과 오염물질 저감장치 마련에 2030년까지 3조원 이상이 필요하다고 봤다. 화학 업계 관계자는 “최근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따른 원재료 가격 인상으로 수익성이 악화된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는 큰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ESG 경영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지난해까지 봇물처럼 쏟아지던 ESG 채권 발행도 규모가 크게 줄었다. ESG 채권은 기업이 ESG 관련 목적에 자금을 쓰고자 발행하는 채권을 가리킨다.
ESG 채권은 지난해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 약 3000억원 발행에 그친 ESG 채권 규모는 2019년 상반기 7조2300억원, 2020년 상반기 33조8148억원에 이어 지난해 상반기 47조6555억원으로 매년 대폭 늘었다. 2018년 이후 3년 만에 발행 규모가 160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올 들어서는 이 같은 흐름이 크게 바뀌었다. 올 상반기 발행된 ESG 채권 규모는 31조366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5% 가까이 급감했다.
무엇보다 기존에는 ESG 채권에 대해 일반 회사채보다 낮은 금리를 부여하는 일종의 프리미엄이 있었으나 올해는 이런 경향이 대부분 사라졌다. 금리가 다소 낮더라도 ESG에 가중치를 두고 투자하는 수요가 없어졌다는 얘기다. 채권 시장 관계자는 “지난해 ESG 채권 발행을 이끌었던 기업들에 대한 관심이 올 들어서는 빠르게 식었다. 경기 침체 가능성이 커지면서 기업들도 이전만큼 ESG에 힘을 쏟기 어려워졌고, 기업 상황과 시장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ESG를 내세워서는 투자금을 모집하기 어려워진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에너지 위기에 생존이 우선
▷모호한 ESG 개념과 평가 신뢰도 발목
ESG의 갑작스러운 추락 배경에는 에너지 확보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중단하면서 글로벌 각국은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에너지 확보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름에 따라 그동안 사용을 줄여야 한다고 했던 화석연료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국제유가는 올 상반기 한때 배럴당 120달러 선에 육박했다 8월 초 기준 90달러 선을 웃돌고 있다. 다소 조정을 받았음에도 1년 전과 비교하면 50% 가까이 급등한 수준이다.
무리한 친환경 정책의 부작용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해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렸던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참가국들이 채택한 ‘글래스고 기후 조약’의 골자는 이산화탄소를 다량 배출하는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중국 등 주요 경제권이 앞장서 추진한 탄소 저감 정책은 뜻밖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아직 발전의 효율성과 안정성이 취약한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성급하게 추진했다가 영국과 중국 등에서 대규모 전력난이 발생했고, 이는 화석연료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ESG의 개념이나 정의 자체가 모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마자 금융계에서는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기 회사나 방산 업체를 ESG에 부합하는 것으로 개념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실제로 스웨덴 최대 글로벌 금융 회사인 SEB은행은 지난해 방위 산업 매출 비율이 5%를 넘는 기업과의 거래를 중단한다는 경영 방침을 밝혔는데, 지난 4월부터 입장을 바꿔 자사의 펀드가 방위 산업에 투자하는 것을 다시 허용했다.
ESG 평가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 ESG가 서로 충돌하는 목표를 한꺼번에 점수로 매김에 따라 실질적인 기업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점수를 매기는 방식에 있어서도 평가 항목이 너무 광범위하고 ESG 평가 회사마다 기준이 제각각이어서 그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일반 기업 신용평가 회사의 상관관계는 99%인 데 반해 ESG 평가 회사들 간의 상관관계는 50%를 조금 넘는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ESG 성과를 부풀리거나 허위로 홍보하는 ‘그린워싱(실제로는 친환경적이지 않지만 마치 친환경적인 것처럼 홍보하는 위장환경주의)’의 폐해도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 5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BNY멜론은행에 150만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 은행이 ESG 투자 정보를 허위로 기재하고 일부를 누락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그린워싱 사례가 증가하자 SEC는 지난해 ‘그린워싱 전담 태스크포스’를 설립했다.
일각에서는 ESG의 무리한 추진보다는 현실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부 선진국의 환경 이데올로기 선점에 끌려다니거나 환경과 사회 정의에 민감해하는 MZ세대 등장으로 형성된 ‘ESG를 신경 쓰지 않는 기업=나쁜 기업’이라는 인식에 휘둘리는 것을 멈추고 실현 가능한 방법으로 탄소중립 관련 정책과 방안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논리다.
기업가치 평가 분야 석학으로 꼽히는 애스워스 다모다란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는 “ESG가 지속되려면 실질적인 기업 성장을 돕는 경영 활동임을 보여줘야 하는 시점이 됐다. 기업은 ESG 경영이 기업 경쟁력을 저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장을 이끌 수 있도록 설계돼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이번 ESG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연우 법무법인 태평양 전문위원은 “최근 해외를 중심으로 ESG 경영에 대한 회의론 혹은 대립각이 나타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은 늦게 시작한 만큼 격차를 좁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이해관계자의 이슈가 다각화되고 있어 기업에 유리한 항목을 다차원적으로 분석해 EGS 경영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류지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71호 (2022.08.10~2022.08.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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