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이 돌아왔다, 2022년의 난중일기를 가지고

이정희 2022. 8. 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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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새 소설 <저만치 혼자서>

[이정희 기자]

'태백산맥이 해안을 바싹 압박하면서 가파른 경사로 물에 잠겼다. 해안 단애가 끊어지는 자리마다 포구 마을이 들어섰다. (중략) 수억 년의 새벽마다 수평선 너머에서 해가 떠올라 빛과 어둠이 스미면서 갈라졌지만 바다에는 시간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았다. 바다의 시간은 상륙하지 않았다. 바다는 늘 처음이었고, 신생의 파도들이 다가오는 시간 속으로 출렁거렸다. ' - <명태와 고래> 중에서 

아마도 책 좀 읽었다는 눈밝은 독서가라면 저 시작하는 문장에서 벌써 이 글을 쓴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첫 문장에서부터, '나요'하고 강력한 인증으로 시작하는 작가, 바로 김훈이다.
 
 <저만치 혼자서> 김훈 작가 프로필
ⓒ 문학동네
한때는 아이돌처럼 김훈 작가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시작은 아마도 <칼의 노래>지 싶다. <칼의 노래>로 시작한 섭렵은 <현의 노래>로, <남한산성>으로 단편 <언니의 폐경>, <화장>까지. 그리고 이제는 읽었는가 안읽었는가조차 가물가물한 그의 소설들을 주워삼켰다.

어디 소설뿐인가. <밥벌이의 지겨움>, 벌써 제목부터 얼마나 매혹적인가. '돌도끼를 쥔 사내에게 친밀감을 느낀다'는 진솔함에, 몸으로 밀어 세상을 느껴가는 <자전거 여행>에서는 산천과 인간의 진득한 조화를 감상했다. 서로 편을 갈라서는데 익숙한 세상에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서는 어른됨의 자리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여자의 '킬힐'에 매료된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까지 찾아읽었었다. 

김훈 작가를 좋아하던 시절은 아마도 내가 어른의 자리를 고민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이는 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 앞에서 막막하고 답답하던 시절에 그의 소설 속 인물의 묵직한 삶의 고뇌를 통해 위로받고, 에세이 속 굳은 심지에 의지했다.

마치 <칼의 노래> 속 이순신처럼 난세의 세상 속에서도 묵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밀고가는 느낌을 받았었다. 현실에서 찾기 힘들었던 삶의 멘토를 글로 찾던 시절이었고 김훈은 그런 나의 베스트 멘토였었다. 

다시, 김훈 

그런 베스트 멘토의 글을 꽤나 파고들던 시간이 흘렀다. 굳이 안읽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저냥 다른 관심사에 파고들다 보니 꽤 오랜 시간 '적조'했었다. 우연히 SNS를 통해 <저만치 혼자서>라는 단편집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필로 쓰기>를 읽었던 게 언제였더라 하다, 여전한 김훈의 문장에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돌이켜지지 않는 것들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저절로 돌아서지도 않을 것이다. - <영자> 중에서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를 한 단락으로 '정의'한다면 <영자>의 저 문장이 가장 어울릴 듯하다. 저와 비슷한 문장이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에도 다시 등장한다. 삶은 바닷물 속에 떠맡겨진 배와 같다.

<명태와 고래> 북의 포구 마을에서 전쟁을 맞은 이들은 사람들이 가는 남쪽으로 배를 몰았다. 하염없이 파도에 배을 맡기다 보니, 북쪽의 포구 마을과 흡사한 마을에 닿아서 그곳에 다시 터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 온 삶의 파도에 자신을 내맡길 수 밖에 없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세대를 막론하고 펼쳐져 있다.

2010년에 발간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담긴 국가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 그로 인해 짓밟힌 이의 인생은 <명태와 고래>에 고스란히 담겼다. <48 GOP>에 드러난 아와 피아가 구분될 수 없도록 뒤엉클어진 유골의 잔해가 바로 우리의 현대사이다. 그 역사의 무게 속에 개인은 함몰되어 죽은 아이를 등에 업은 듯한 삶을 살아왔고, 그 삶은 지금의 세대에게로 이어진다.

그렇게 할아버지 세대가 전쟁의 무게를 짊어졌다면, 그 아비의 세대는 생존의 무게에 허덕이며 살아왔다. 오랜만에 찾아온 첫사랑이라고 규명하기도 무색한 나은희의 편지를 받은 주인공은 그 기억을 구석기 지층에서 찾듯 끄집어 낸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그 시절의 세대는 차마 서로를 잡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헤어졌다. 오랜 시간이 흘러 찾아온 나은희의 편지는 아들의 취직을 청탁하고 있었다.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닥쳐오고, 그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건 나이가 들어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노년에도 살아갈 공간이 필요하고, 내 육신 하나 건사할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을 따르는 '개'를 내칠 만큼. 

어디 노년만 그럴까, 사십 년 전 살기를 도모해 바다 건너 헤어짐을 담담히 수용했떤 청춘들은 이제 사십 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다. 노량진 구준생으로 만난 영자와 주인공은 지방 출신으로 '공시'의 관문에서 허덕이며 사십 년 전 '어른'들의 이별을 되풀이 한다. 
 
 책 <저만치 혼자서> 표지 이미지
ⓒ 문학동네
 
삶의 전장에서 
<저만치 혼자서>를 읽다보니 <칼의 노래>가 오버랩된다.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다가올 단 한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중략)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중략)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 <칼의 노래> 중에서 

<칼의 노래>는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자기 헌신을 담아냈지만, 그가 그런 결말을 스스로 맞이한 데는 그가 처한 전장, 그곳에 낭자한 인간의 처절한 삶에서 비롯된다. 김훈의 글처럼, 수사없이 서늘한 난중일기의 문장들은 끼니에 무력한 인간사의 모습을 가감없이, 그래서 처절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그런 <칼의 노래> 속 인간군상의 모습이 이제 다시 <저만치 혼자서>에서 재연된다. 저 높은 빌딩과 화려한 문명의 시간이 다름아닌 세대를 이어내는 전장에 다름 아닌 것이라 글은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난중'에 산다. 그건 '아파트' 한 채를 위한 싸움일 수도 있었고, 9급 공무원 한 자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 늙은 몸 누일 방 한 칸이 되고, 결국 내 육신 그 자체가 되고 만다. 
 
'멀리서 한 걸음씩 다가오는 초졸들을 (중략) 막을 수 없었다. (중략) 장기판에서는 갈 수 없는 길들이 빤히 보였다. 갈 길은 못갈 길 뒤에 숨어있다가 빼도박도 못하게 되면 비로소 보였고 보이면 갈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다가와서 흘러가고 또 흩어지는 것이 쌓여서 (중략) 아무런 힘도 작동시킬 수 없었다. ' - <저녁 내기 장기> 중에서 

하지만 <칼의 노래>가 그런 '비인간'의 시간 속에서 이순신 장군의 의지를 길어냈듯이 <저만치 혼자서>는 구차한 인간사를 진솔하다 못해 비루하게 그려내면서, 결국 '생명'이 본연의 의미에 주목한다. 그저 '살아내는 것'.

마지막에 실린 <저만치 혼자서>는 도라지꽃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수녀원을 그린다.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김루시아 수녀는 오물묻은 자신의 속옷을 어떻게든 자신이 건사하려 애쓰다 생을 마감한다. 싸움을 개별적인 것이고, 싸울 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 무효라던 <칼의 노래> 속 전장은 이제 우리 삶의 전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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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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