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29>] 첫사랑

데스크 2022. 8. 1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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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29화 첫사랑


방선희를 처음 보게 된 건 대학교 문학서클 신입생 환영회였다. 서클 선배들이 토요일 오후 학사주점 하나를 통째로 빌려 새내기 후배들을 환영하는 자리였는데 그냥 먹고 마시고 춤추는 한마당이었다. 신입생들은 하나같이 새롭게 접하는 대학문화에 들떠 기분 좋게 취했고 유쾌하게 놀았다. 방선희는 그날 다섯 명의 신입 여학생들 가운데서 단연 눈에 띄는 미모로 뭇 남학생들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카시아향이 코끝에 스치듯 봄은 무척 빠르게 지나갔다. 감옥과도 같은 학교와 입시지옥에서 해방된 이철백은 캠퍼스 생활에 적응하느라 매우 분주했다.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친구에게 할애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얼떨결에, 아니 오지랖 넓게 과대표를 맡아 교수와 학우들, 그리고 선배들 사이에서 가교 내지 전령 노릇까지 하게 되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학과의 일들이 마무리되자 이번엔 문학 서클의 상황에 신경이 쓰였다. 현직 과대표 프리미엄이 반영되어, 아니 오지랖 넓은 성격이 선배들에게 포착되어 이철백은 서클 기수대표를 맡았는데 상반기 동안 동기모임 한번 제대로 가지지 못했었다. 이철백은 종강하기 전 모임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열 명 남짓한 동기들의 학과사무실을 찾아다녔다. 집 전화번호와 강의시간표 따위를 입수하기 위해서였다.


이철백은 집으로 전화하거나 강의실에 직접 찾아가는 방식으로 모임을 알렸다. 그런데 유독 방선희에게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학과사무실과 학우들의 전언에 의하면 방선희는 기말고사가 끝난 이후 학교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집으로 전화한다 해서 통화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철백은 방선희를 제외하고 동기모임을 가져볼까도 생각했지만 신입생 환영회 때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에 이미 사사로운 감정이 가슴 깊숙이 밀고 들어와 그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엔 연락수단이 유선전화밖에 없었으므로 이철백은 시도 때도 없이, 늦은 시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선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부모님이 받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하며 가슴 졸이면서도 방선희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철백은 과감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수차 시도한 끝에 이철백은 마침내 방선희와 통화할 수 있었고 동기모임에 불러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그 모임을 계기로 이철백은 방학 중에도 방선희를 만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방선희에게 마음을 둔 서클 동기나 선배들이 대시했다가 매정하게 퇴짜 맞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장밋빛 여름방학을 보내고 가을학기가 시작되자 이철백은 종종 방선희와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하고 호프를 마시기도 하고 영화관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인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사범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말을 꺼내놓으며 어머니가 어떻고 동생들이 어떻고 하며 집안 얘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방선희는 전혀 자신의 집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철백이 가족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가 방선희의 얼굴이 불현듯 굳어지는 걸 보고는 황급히 화제를 돌려야했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 둘 사이에 집안 얘기는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다.


그랬던 방선희가 먼저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꺼내 놓은 적이 있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늦가을 캠퍼스에 석양이 길게 드리워지는 초저녁 무렵이었다. 이철백이 도서관 문을 열고 나오자 찬바람이 낙엽을 몰고 세차게 불어왔다. 이철백은 기말고사 준비를 하느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철백아.”


방선희가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술 한 잔 할까?”


방선희가 먼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평소와 달리 우수에 찬 얼굴이었다. 이철백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철백은 저녁식사 후 다시 도서관에 돌아오려던 생각을 접고 가방을 챙겨 나와 방선희를 데리고 학교 앞 소주방으로 갔다. 방선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 이철백은 긴장된 표정으로 방선희의 말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우리 2차 가자.”


소주방에서 한참 앉아 있다가 방선희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방선희는 독한 소주를 제법 마셨는데도 그렇게 취해 보이지 않았다. 둘은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와 호프집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방선희는 한 마디 말없이 술만 마시며 이철백의 속을 태웠고, 상당히 취하고 나서야 가족 얘기를 시작했다.


꽤 긴 시간 동안 혀 꼬부라진 소리로 방선희가 털어놓은 얘기를 요약해보면 이러했다. 사고로 양친을 여의고 어린 동생 둘과 함께 살고 있는 방선희는 백부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 지방의 국립대학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입시험 성적만으로 따져보면 서울의 유수한 대학에도 갈 수 있었다. 어쨌든 백부의 경제적 지원은 세 식구가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지만 불과 얼마 전 백부가 사업실패로 파산상태에 빠지면서 방선희는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버렸다.


방선희는 그날 제법 술에 취해 이철백에게 학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 없냐고 묻더니 이내 다시 묻고 또 물었다. 남들이 보면 술주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철백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서둘러 방선희를 다독거렸다. 그리고 자꾸만 술을 더 시키려는 방선희를 구슬려 호프집을 빠져나왔다. 이철백은 네온사인과 조명으로 환한 밤거리를 방선희가 정신 차릴 때까지 팔짱을 끼고 함께 걸었다.


이튿날 학생처를 방문한 이철백은 학내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았다. 담당직원은 학기 초에 아르바이트 모집을 하니 그때 가서 보자고 타이르듯 말했지만 이철백은 막무가내로 일관했다. 혹시 자리 난 거 없어요, 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학생처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하던 어느 날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학기 초가 아니면 힘들다던 담당직원이 마침 도서관에 아르바이트가 났다면서 서둘러 접수해 보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방선희는 사서 일을 하며 겨울방학을 보냈고 이철백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방선희를 보러 도서관에 쫓아다녔다. 방학 중에도 매일 같이 도서관에 간다고 집을 나서는 아들이 대견했던지 부모님은 두둑한 용돈을 쥐어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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