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초딩의대반'은 있고, 의사는 없고..
이걸 ‘K아이러니’라 불러야 할까. 지난달 24일 서울의 ‘빅5’ 종합병원에 “의사가 없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뇌출혈로 쓰러진 30대 간호사는 수술을 맡을 뇌혈관 신경외과 의사가 없어서 결국 숨졌다. 우리의 생명과도 직결된 답답한 현실은, 들여다볼수록 아이러니하다. 서울 대치동과 목동 학원가에 설치된 ‘초딩의대반’을 보면 더 그렇다. 최고급 ‘선행(先行) 프로그램’은 초3 때 5·6학년 수학을 마치고, 고학년 때 중·고교 과정을 마스터한다. 히포크라테스도 감격할 ‘의사 만들기 10개년 계획’ 아닌가.
‘나잇대와 다른 선행학습이 이루어지다 보니 걱정이 될 수도 있겠으나 ○○학원은 월 성적표와 정기상담을 통해 꼼꼼한 밀착관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믿고 맡기실 수가 있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초딩의대반 안내문이 뇌혈관 신경외과 의사가 사라진 병원의 현실과 대조된다. 이런 초딩의대반을 갖춘 나라에 의사가 없다니….
문제의 ‘개두(開頭) 수술’ 의사는 빅5에도 2~4명밖에 없다. 원인은 현실적이고 구조적이다. 이런 질문으로 요약된다. “같은 돈 받고 쌍꺼풀 수술을 하지, 10시간 넘게 개고생하고 환자 사망까지 책임져야 하나요?” 보건복지부와 의사단체 등은 이번 사고를 분석하고 대책을 찾는 회의를 지난 8일 열었다. 사망 확률이 높은 상태이긴 했지만, 뇌혈관을 다룰 의사가 부족한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모였다. “의사를 늘려야 하지만, 그게 능사는 아니다. 위험한 의료행위를 감당한다는 자긍심을 키우고, 합당한 보상도 뒤따라야 한다”는 대책도 논의됐다.
정책 엘리트들이 대안을 찾을 거라 믿고 싶지만, 보건의료의 ‘빠꼬미’인 공무원 집단과 빅5 의사들이 실상을 몰랐겠는가. 그동안 많은 것이 방치됐고, 남 탓으로 돌려졌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교육계에서는 초딩의대반 출신이 쑥쑥 성장했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데 익숙한 그들이 미래에 뇌혈관 수술방에 남게 될지는 미지수다. 자녀에게 수억 원을 투자한 부모는 과연 어떤 의사를 원하고 있을까.
이번에 확인한 분명한 사실은 전·현 정부, 여야, 관료와 전문가, 시민사회단체 등 사회의 누구도 ‘백년대계’를 제대로 세울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실력과 경험이 부족할 뿐 아니라 그 첫 단추인 공론장(公論場)조차 만들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편협한 이념과 소속 집단의 이익을 백년대계로 위장해 온 게 정책의 역사 아니었던가. 최근 논란이 된 만 5세 입학, 외고 폐지, 검수완박 또는 경수완박이 그렇게 망가졌다. 10년을 내다보고 초딩의대반을 만든 ○○학원이 오히려 현명해 보이는 아이러니가 서글프다.
김승현 정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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