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벌벌 떠는 왜군, '한산'을 지배하는 정서

고광일 2022. 8. 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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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한산: 용의 출현>

[고광일 기자]

 
▲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한산: 용의 출현>은 이상한 영화다. 영화 팬들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는 아래의 4DX 관람 후기에 의하면 그렇다. 

일본 첩자를 조선군이 때릴 때 의자가 흔들리고
거북선이 일본배를 쏠 때 의자가 나를 치고
거북선이 일본배랑 부딪힐 때 의자가 흔들리면서 내가 아픔
일본군이 맞는데 내가 아픔 

일명 '왜구 체험'이라고 불리는 이 후기는 과장과 유머가 적절히 섞여 있지만 <한산>의 특징을 압축한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후기다.

이상한 영화 <한산>의 오프닝을 여는 건 뜻밖에도 이순신 장군(박해일)과 조선군이 아니라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다. 와키자카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서신을 낭독한다. 조선 정벌의 의지를 담은 낭독이 끝나면 카메라는 곧장 왜군 진영을 비춘다. 와키자카는 한 달 전 사천 해전에서 살아남은 패잔병들을 찾아가 당시 상황을 묻는다. 패잔병들은 조선군의 거북선을 해저 괴물 '복카이센'이라고 표현하며 두려워하고, 와키자카는 '두려움은 전염병'이라며 부하들을 시켜 패잔병들을 살해한다.

편지 낭독과 잔혹한 학살신이 끝난 뒤. 화면은 한 달 전 일어난 사천 해전으로 바뀌고 드디어 조선군과 거북선이 등장한다. 거북선이 등장했음에도 카메라의 시선은 여전히 왜군을 대변하는 듯하다. 배로 들이받는 충파와 강력한 대포로 통쾌하게 왜군을 박살 내는 모습이 아니라 거북선을 만나 어쩔 줄 모르는 왜군의 두려움이 스크린을 채운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떠나 건조한 제 3자의 관점으로 이 장면을 본다면 조선군은 절망을 가져오는 괴물이나 재앙에 가깝다. 후술하겠지만 이 절망이 <한산>을 지배하는 정서다.
 
▲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역사와 싸우는 <한산: 용의 출현>

영화 <한산>의 필사의 적은 왜구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다. 전작인 <명량>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명량>은 역사적 사실 만으로도 스토리가 풍부하다.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선조의 질투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실책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해군을 수습해 고작 12척의 배로 133척을 패퇴시키며 조선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다. 반면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 같은 최신 기술은 물론이고 잘 훈련된 최정예 조선 수군을 이끈다. 최신기술, 정예병, 뛰어난 장수가 승리를 쟁취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

무난하고 당연한(?) 승리 과정을 극적으로 만든 건 '모순'이다. 영화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의 묘책은 수비를 위한 공격이라는 모순에서 나왔다. 김 감독은 와키자카를 세심하게 갈고 닦아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명장으로 조각했다.

2천 명으로 5만 명을 패퇴시킨 광교산 전투를 시각적으로 구현해 젊은 맹장의 이미지를 구축함과 동시에 왜군을 두려움에 떨게 한 거북선의 약점과 조선군의 작전을 알아내기 위한 밀정의 활용, 육로를 통한 양동작전 기획 등 치밀하고 꼼꼼한 전략가임을 공들여 표현했다. 라이벌인 가토의 배를 빼앗는 장면에서는 비정한 승부사의 면모도 보인다.
 
▲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첩보전을 통해 와키자카는 측면이 부실하다는 거북선의 약점과 속력은 낮지만 선회가 쉬운 판옥선의 장점을 살려 한산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쓰려는 조선군의 작전까지 알게 된다. 실제로 전투가 시작된 이후에는 조선군의 뻔한 도발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승리의 토대를 다져나가려는 이성적인 판단도 장군감으로도, 전쟁영화 한 편의 주인공으로도 손색이 없다. 아마 평범한 전쟁영화였다면 와키자카의 이런 노력이 이순신이라는 막강한 적을 꺾는 승리의 실마리가 됐을 거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결과는 냉정했다. 이순신은 와키자카보다 한 수 더 내다보았다. 나대용(박지환)의 연구로 거북선은 충파 이후 기동이 어렵다는 약점을 개량해 왜구의 진형을 뒤흔들어 놓았다. 와키자카는 학익진의 파훼법을 알고 있었지만 적함이 50보 내에 들어와도 선회할 수 있을 만큼 훈련된 조선 격군들의 숙련도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끝까지 훼방을 놓던 원균도 '바다 위의 성'이라는 감탄사를 내뱉게 만든 이순신의 지략과 철저한 준비성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펼쳐진다. 어릴 때부터 성웅 이순신의 무공을 듣고 자란 한국인이면 버티기 힘든 카타르시스다.

<한산>의 또 다른 장점은 영화적이라는 사실이다. 학익진은 전 국민이 알지만 (그 역시 상상 속이지만) 실제로 펼쳐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또한 밀리터리나 역사 마니아가 아니라면 중세의 전함이 어떤 형태로 전진하고 수비를 하는지, 견내량에서 한산 앞바다로 이어지는 지형의 생김새와 그를 활용한 전투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한산>을 본 사람은 학익진은 물론이고 그의 파훼법인 어린진이 어떤 모양인지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다. 고대 해전에서 지형지물과 전함의 특성에 따라 전략이 어떻게 달리 전개되는지 <한산>만큼 알기 쉽게 그린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내적완결성의 부재는 장점인가 단점인가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투에 치중에 탓일까. <한산>에서 뽑아낼 수 있는 서사적 감동은 액션의 쾌감만큼 짙지 않다. '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 명명했음에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임진왜란이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과 무엇이 다른지는 관객에게 쉬이 전달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말한 '왜구체험' 에피소드처럼 <한산>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다면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 극 중에서 이순신 장군의 대사는 출격하라, 발포하라 등 기능적으로 밖에 쓰이지 않는다. 어떤 전략을 사용할 것인지 묻는 부하들의 질문에도 그저 입을 다문다. 고뇌와 심사숙고가 의사소통의 단절은 아닌데 말이다. <한산> 명대사가 <헤어질 결심>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해준의 대사들로 치환된 것도 이순신이란 캐릭터 구성의 실패와 맥락이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내적완결성이 결여됐다는 이 단점을 장점으로 연결 지어 모순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할 <노량>이 남았기 때문이다. 와키자카는 두려움을 전염병이라고 판단해 아군을 베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런 와키자카를 물리치고 <명량>에 이르러서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방법을 고민했다.

'마침내' 두려움을 극복한 한국사 최고의 명장이 이끌 비장한 최후의 전투가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가 없다는 거짓말은 할 수 없겠다. 또 한 번의 왜구 체험이 적잖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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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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