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28>] 해후

데스크 2022. 8. 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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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28화 해후


시나브로 시간은 줄기차게 흘러갔다. 김석규가 입원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나 계절은 목하 여름이었다. 가로수의 신록은 어느새 짙어져 버렸고 무더위에 지친 대기는 오후 늦게까지 후끈후끈한 열기를 내뿜었다. 이철백은 택시 승차장에서 승객을 기다리며 정차하고 있다가 문득 ‘김석규의 팔자가 상팔자구나’ 하고 삼단논법을 동원한 결론에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술 먹으면 개. 개 팔자가 상팔자. 고로 김석규의 팔자가 상팔자.


어느 정도 치료가 되었는지 병원 생활은 잘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막상 병문안을 가려하면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어떨 땐 옥탑방 월세 내느라 돈이 없었고 어떨 땐 김석규의 말마따나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적을 섬멸하느라 다음날 뻗어 있곤 했다. 그리고 어떨 땐 전처에게서 양육비 독촉이 들어와 꼬박 사흘을 택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잠수 타는 한종탁이 얼마 전에 전화를 해왔었다. 요즘 백일기도에 정진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철백이 기도원 같은 데 들어가 있냐고 물어보니까 한종탁은 그게 아니라 그냥 술을 안 마시기 위해 때와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백일기도 입문 사유로 김석규의 전격적인 입원을 들었다. 음주습관과 아내의 견제행태가 너무나 흡사해 김석규 도플갱어라 불리는 한종탁은 누구보다도 크게 충격 받은 모습이었다.


또한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임봉식도 금주하는 중이라고 했다. 임봉식은 살림하는 틈틈이 식탁에 앉아 홀짝홀짝 술 한 잔씩 하는 게 낙이었는데 어느 날 문득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다가 무시로 술잔을 드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이전에 없던 기이한 감정이었다. 입산하지 않고도 무욕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다며 그걸 증명해 보이려 아무런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고 아내 정수진의 속을 긁어대던 임봉식이었기에 자괴감 같은 감정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전에는 없던 기이한 감정이 어떤 연유에서 발생하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병원을 찾아야 했지만, 무욕무소유를 실천하려고 아무런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는 임봉식은 돈이 드는 일이라며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다만 돈이 들지 않는 TV 시청을 꾸준히 해온 결과 자신의 상태가 갱년기 증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임봉식은 TV 주치의가 조언해 준 대로 무엇이든 목표를 정해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건강프로그램이 끝난 후 방영된 뉴스 시간에 공무원시험 연령제한이 없어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날 저녁 임봉식은 술을 끊고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정수진이 크게 기뻐하며 적극 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철백은 주위의 친구들이 하나둘 단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입원 중인 김석규를 떠올렸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전선을 지켜달라는 김석규의 부탁과 달리 전우들은 미련 없이 전선을 떠나고 있었다. 김석규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그렇지만 이철백은 자신이라도 전선을 사수해서 김석규의 부탁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술이 좋아서, 시간이야 언제든 넘쳐나는 거니까 돈이나 물주만 있다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음주에 매진할 뿐이었다.


홍 기사에게 전화가 온 건 저녁을 먹으러 기사식당에 들리려던 참이었다. 홍 기사가 ‘블랙&화이트’라는 술집에 있으니 당장 한잔하러 오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이철백은 명령조의 말투에 기분이 살짝 나빠진데다 홍 기사의 목소리에서 취기가 느껴져 완곡하게 거절하고는 기사식당에 들어갔다. 이철백이 된장찌개를 시켜 먹고 있는 와중에 홍 기사의 전화가 몇 차례 왔지만 술 취하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무시해 버렸다.


기사식당을 나서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직장인의 퇴근시간은 지났고 음주승객이 귀가할 시간은 아직 멀어서 밤거리는 여유롭고 평온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이철백은 승객을 찾아 택시를 몰고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택시 승객은 눈에 띄지 않고 반갑지 않은 홍 기사의 전화만 계속 들어왔다. 이철백은 도로변에 택시를 세우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홍 기사의 전화를 받았다.


“왜 그래. 나 돈 좀 벌어야 한단 말이야!”


“돈이야 내일 벌면 되는 거지. 여기 좀 와라. 예쁜 아가씨 소개 시켜줄 테니까.”


걸핏하면 분유 값 벌어야 된다며 술자리를 피하던 홍 기사도 막상 취하고 나니 가관이었다.


“아가씨는 무슨, 나 월세 밀렸어.”


“월세야 천천히 주면 되지. 너 오늘 여기 안 오면 후회하게 돼.”


“나 좀 후회하고 살자. 난 너무 후회를 안 해서 탈이야.”


“농담 아냐. 진짜 기 막힌 아가씨 소개해 줄 테니까. 에이 씨팔, 몰라.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아라.”


홍 기사가 느닷없이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홍 기사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이철백은 은근히 호기심이 일었다. 도대체 어떤 아가씨를 소개해 준다는 거야. 불이 나게 울리던 전화가 잠잠해지자 궁금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이철백의 택시는 어느새 블랙&화이트로 향하고 있었다.


“이 기사!”


불콰해진 얼굴로 홍 기사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홀 안엔 홍 기사 말고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블랙&화이트는 대여섯 테이블 규모의 아담한 맥주홀이었다. 홍 기사는 마담인 듯한 중년의 여인과 함께 앉아있었다. 이철백은 단아하게 앉아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홍 기사에게 다가갔다.


“나 참, 일 좀 하자니까!”


이철백은 여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문득 기분이 좋아져 홍 기사에게 빈말로 퉁을 놓았다.


“이 기사, 여기 앉은 사장님 모르겠냐?”


홍 기사가 마담을 가리키며 키들키들 웃었다. 이철백은 유심히 마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담도 홍 기사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이철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장님은 널 안다던데? 내가 택시 한다니까 당장 네 이름을 들먹이던데.”


홍 기사가 힌트랍시고 한 마디 툭 던졌다. 하지만 이철백이 택시기사로 일하는 거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철백의 택시 경력은 자그마치 이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나 모르겠어?”


마담이 다소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말을 놓을 정도면 최소한 친구였다는 방증인데 만약 이철백이 기억해 내지 못한다면 그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이철백은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기억의 심연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방, 선, 희?”


이철백이 자신 없어 하는 목소리로 응수타진을 해보았다.


“그래 나, 선희야. 방선희. 정말 오랜만이다, 얘.”


마담이 반가움에 부들부들 떨며 이철백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철백은 내심 긴가민가하며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우선은 방선희의 손을 맞잡으며 반가운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방선희의 얼굴은 많이 변해 있었다. 하긴 벌써 이십오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변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그게 이상할 일이긴 했다. 방선희는 세월의 뒤안길을 돌아서 적당히 살이 붙은 중년여성의 모습으로 이철백과 마주하고 있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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