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보러가고, 펠로시는 통화만.."尹정부 딜레마 드러났다"
휴가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4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일행과 40분간 통화했다. 윤 대통령은 통화에서 “지난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약속한 한·미 동맹의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 발전을 위해 미국 의회와 긴밀하게 협력할 것”이라며 “(펠로시 의장 일행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하는 것은) 한·미 간 강력한 대북 억지력의 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국가안보실 김태효 1차장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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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과 면담 아닌 통화한 펠로시
이날 윤 대통령과 펠로시 의장 일행 간의 통화에서는 외교와 국방, 기술협력과 기후변화 등 광범위한 주제가 다뤄졌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이 첫 여름 휴가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시간을 내준 데 대해 감사하다”고 인사한 펠로시 의장은 “한·미 동맹은 여러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도덕적 측면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워싱턴에서 최근 한·미 추모의 벽 제막식이 거행됐듯이, 그동안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온 평화와 번영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가꿔나갈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펠로시 의장은 또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핵심축으로서 한·미 동맹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며 “한·미 간 자유롭게 개방된 인도·태평양 질서를 함께 가꾸어 가자”고 말했다.
이날 통화에는 펠로시 의장 외에 미 연방 하원의 그레고리 믹스 외교위원장, 마크 타카노 재향군인위원장, 수잔 델베네 세입세출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계인 앤디 김 의원과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가 참석해 확대 회담 형식의 통화로 진행됐다. 윤 대통령은 의원단에 “각 지역구의 코리안 아메리칸 한인들에게 특별히 배려해달라”고 당부했다. 미·중 갈등의 도화선이 된 대만과 관련한 언급은 없었다고 한다.
펠로시 하원 의장은 미 의전서열 3위의 최고위급 인사다. 이런 그와 면담이 아닌 통화가 진행된 것과 관련해 최영범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펠로시 의장 방한과 윤 대통령 휴가 일정이 겹쳐 예방 일정을 잡기 어렵다고 미국 측에 사전에 설명했고 펠로시 의장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했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등 중국을 고려한 것 아니냐는 질문엔 “국익을 고려한 총체적 결정”이라고 답했다. 이어진 브리핑에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중국을 의식한 것은 아니다”고 재차 강조했다.
대통령실의 설명에도 ‘면담 아닌 통화’에 대해 정치권에선 논란이 이어졌다. 펠로시 의장은 한국에 오기 전 대만에선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오찬을 했고, 5일엔 도쿄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와의 만남을 조율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이 “동맹국 미국의 의회 1인자가 방한했는데 휴가 중이라 만나지 않는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윤 대통령은 펠로시 의장을 만나야 한다”고 비판한 게 대표적이다. 특히 전날 공개된 연극 관람 일정, 또 술을 곁들인 뒤풀이 사진이 논란을 키운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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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30주년 앞둔 尹의 고심
대통령실은 면담 불발과 관련해 “중국을 의식한 것이 아니다”고 했지만, 실제 속사정은 더 복잡하다. 중국은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뒤 “대만 독립은 죽음의 길”이란 선전포고에 가까운 공식 입장을 냈고, 대만을 6방향으로 포위한 실사격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최대 무역국이자 북핵 문제까지 중국과 조율해야 하는 한국 입장에선 상당한 부담이다. 24일 한·중 수교 30주년을 앞두고 박진 외교부 장관의 방중을 조율 중인 상황이기도 하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일본의 경우 펠로시가 우리를 거쳐 방문하지만, 우리 정부는 대만에서 바로 온 펠로시를 만나야 한다”며 “대중 관계를 고려했을 때 상당한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제로 대통령실은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한 끝에 면담 대신 통화를 택했다고 한다. 펠로시 의장이 정치인인 만큼 돌발 발언 등의 변수도 고려했다는 것이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과 전화통화를 한 것은 전략적 선택의 일환”이라며 “미국 측에 한·미 동맹을 최우선가치로 한다는 점은 확실히 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박진 외교부 장관의 업무보고에서 윤 대통령이 한·미·일과 대만의 반도체 동맹을 뜻하는 ‘칩4’ 가입과 관련해 “어떤 특정 국가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익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며 “중국이 오해하지 않도록 잘 설명을 하라”고 지시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란 설명이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펠로시의 방한은 윤석열 정부가 미·중 사이에 처한 딜레마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전화 통화와는 별개로 의전 홀대 논란도 일었다. 3일 저녁 펠로시 의장이 오산 미 공군 기지에 도착했을 당시 정부 관계자나 여야 의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영범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의회 인사는 국회에서 담당하는 것이 관례인데, 미국 측에서 늦은 시간 공군기지를 통해 입국하게 되면서 영접을 사양했다”고 말했다.
국회의장실도 “영접 여부에 대해선 미국 측과 충분한 사전 논의가 있었는데, 미국 측이 국회 내 행사만 의전을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일반적으로 한·미 의원친선협회 소속 의원이나 국회 측에서 영접을 나가지만 미국 측 요청에 따라 안 나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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