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족 성지'..10년 만에 화려한 부활
압구정로데오
노티드·도산분식 '힙' 브랜드 대거 입점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2000년대 초반 ‘오렌지족의 성지’에서 2010년대 ‘퇴물 상권’으로 전락했던 ‘압구정로데오’가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상권 쇠락과 함께 찾아온 임대료 폭락 덕분에 이제는 전국에서 가장 ‘힙’한 브랜드들의 격전지로 거듭났다.
매경이코노미가 연재 중인 ‘포스트 코로나 신상권 지도’ 3편의 주인공은 ‘압구정로데오’다. 매경이코노미가 빅데이터 전문 기업 ‘나이스지니데이타’와 손잡고 올해 4~5월 두 달 동안 전년 대비 매출이 가장 많이 늘어난 상권을 조사한 결과, 압구정로데오가 가로수길과 홍대입구에 이은 3위를 차지했다. 매출 증가액은 283억3000만원, 같은 기간 점포 수는 41개 늘어났다. 가로수길·논현역과 함께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도 매출이 떨어지지 않은 서울 내 몇 안 되는 상권이 바로 압구정로데오 상권이다.
▶골고루 구성된 소비 포트폴리오
▷코로나 팬데믹에 매출 오히려 성장
압구정로데오 상권은 압구정로(북쪽), 언주로(서쪽), 압구정로 60길(동쪽), 도산대로(남쪽) 등 4개 거리에 둘러싸여 있다. 위로는 갤러리아 백화점, 서편으로는 가로수길, 동편으로는 청담동 명품 거리와 맞닿아 있다.
압구정로데오 상권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는 ‘다양성’이 아닐까 싶다. 비교적 크지 않은 상권임에도 불구하고 외식을 비롯해 카페, 주점, 의료, 패션, 전시 등 다양한 업태의 매장이 오밀조밀 골고루 자리 잡고 있다.
매출 증가 1·2위 상권인 가로수길·홍대입구와 비교하면 압구정로데오의 다양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가로수길과 홍대입구의 올해 매출 증가 상위 업종을 살펴보면 한쪽으로 쏠려 있는 양상이 포착된다. 가로수길은 성형외과(1위), 일반 병원(2위), 치과(3위), 안과(5위), 약국(6위), 피부과(10위) 등 의료 서비스 분야가 상권 매출 증가를 견인했다. 반면 같은 기간 홍대입구 매출 증가 상위 업종은 한식·백반(1위), 호프·맥주(2위), 소주방(6위), 커피 전문점(7위), 일식(8위), 양식(9위), 갈비·삼겹살(10위) 등 대체로 먹거리에 집중돼 있다.
압구정로데오는 조금 다르다. 매출이 가장 많이 오른 업종은 ‘백반·한식’으로 전년 대비 43억원이 올랐다. 한편, 2위부터 4위까지는 피부과·병원·성형외과 등 의료 서비스다. 밑으로는 바·카페(6위)와 양식(7위)은 물론 안경점(10위), 한복(11위), 스포츠용품(12위)에 이르기까지 매출 증가 업종이 다양하다.
‘안정적인 포트폴리오’ 덕분일까. 압구정로데오 상권은 코로나 팬데믹도 비껴갔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4~5월 매출(1608억원)이 코로나 이전이었던 2019년 4~5월(1477억원)보다 높았다. 2021년 매출이 2019년 매출보다 늘어난 상권은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같은 기간 홍대입구 상권 매출은 1871억원에서 1475억원으로, 종로3가역 상권은 736억원에서 611억원으로 각각 100억원이 넘는 하락폭을 보였다. 교대역(1182억원→1040억원), 역삼역(913억원→725억원), 신림역(850억원→729억원), 잠실새내역(725억원→620억원) 등 다른 주요 상권도 마찬가지다.
김도훈 나이스지니데이타 연구원은 “압구정로데오는 ‘종합 상권’이다. 인근 가로수길처럼 의료 서비스 매출이 강세를 보이는 동시에 커피 전문점이나 가볍게 음주를 즐길 수 있는 형태의 ‘바’ 매장도 매출이 잘 나온다”고 설명했다.
압구정로데오 인근에서 캐주얼 와인 다이닝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승석 씨(가명)는 “가로수길과 압구정로데오의 가장 큰 차이점은 2차 소비가 상대적으로 활발히 이뤄진다는 점이다. 피부과 시술을 받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가로수길과 달리 압구정로데오는 커피 전문점과 편집숍, 복합문화공간 등 다양한 형태의 매장이 여럿 자리 잡고 있어 상권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고 설명했다.
▶시간대별로 붐비는 골목 달라
▷1시에는 도산공원, 6시엔 메인 거리
압구정로데오는 골목마다 상권 특성도 분명한 편이다. 시간대별로 사람들이 붐비는 골목이 조금씩 다를 정도다.
예를 들어 식사 시간대에는 도산공원 동편과 현대아파트 동편 골목에 사람이 많다. 도산공원 동편에는 리틀넥 청담·다운타우너·도산분식·벽돌해피푸드 같은 캐주얼 다이닝이, 현대아파트 동편에는 압구정하루·닭으로가·박대박부대찌개처럼 수십 년 동안 거리를 지켜온 한식 맛집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식사 시간을 지나 오후 2~3시 정도가 되면 도산공원 주변 ‘카페 골목’에 사람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이곳에는 커피 전문점과 브런치 전문점을 비롯해 다양한 쇼핑 공간과 전시를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 대거 들어서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감각적인 건물 안쪽에서 브런치와 자체 제작한 디퓨저도 판매하는 카페 ‘꽁티드툴레아’를 비롯해 브런치·베이커리 맛집으로 유명한 ‘웨이크앤베이크’, 프리미엄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가 기획한 카페이자 복합문화공간인 ‘누데이크 하우스 도산’ 등이 있다. 특히 누데이크 하우스 도산은 최근 축구선수 손흥민과 손잡고 팝업 스토어를 여는 등 주말이면 공간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 밖에도 스포츠용품을 판매하는 ‘UFC 도산 직영점’, 명품과 디저트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메종에르메스 도산 파크’, 우영미 플래그십 스토어와 솔리드옴므 플래그십 스토어가 입점해 있는 ‘맨메이드 도산’ 등 다양한 팝업 공간이 운집해 있다.
오후 6시가 지나면 압구정로데오 상권 유동인구의 흐름이 메인 거리 쪽으로 쏠린다. 음주를 즐기러 온 2030세대들로 거리가 가득 찬다. 300여종 전통주를 즐길 수 있는 ‘백곰막걸리’와 살얼음 생맥주로 유명한 ‘반반포차’를 기점으로, 북쪽으로는 알록달록한 네온사인으로 무장한 ‘달팽이포차’ 골목이 ‘핫’하다. 달팽이포차 옆에는 압구정로데오 전통 포차인 ‘밀크포차’, 최근 인기를 얻는 막회집 브랜드 ‘초장집’ 등 인기 매장이 즐비하다. 캐주얼 와인 다이닝바 ‘목탄장’ ‘화빙장’ ‘와인주막차차’ ‘우아인’도 인근에 위치해 있다.
▶2010년대 쇠락으로 임대료 ‘뚝’
▷살아남은 전통의 강호+신진 브랜드
압구정로데오에 이처럼 다양한 매장이 들어서게 된 배경에는 ‘저렴한 임대료’가 있다. 압구정로데오를 대표하는 전통의 강자들은 자리를 계속 유지한 상태에서, 저렴한 임대료를 노린 새로운 브랜드의 입점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됐다는 분석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오렌지족’과 ‘패션 피플’의 성지로 군림하던 압구정로데오는 2000년대 중반 들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너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존에 있던 가게들이 속속 빠져나갔다. 인근에 ‘가로수길’이라는 새로운 상권이 등장한 것도 압구정로데오 쇠퇴를 불러왔다.
위기는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됐다. 임대료가 뚝뚝 떨어지고 반대로 인근 가로수길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거꾸로 개성 있는 가게들이 압구정로데오에 앞다퉈 입점하기 시작했다. 10년 전과는 꼭 반대의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2017년 압구정로데오에 현지식 태국 음식 전문점 ‘까폼’을 개장한 이현종 대표는 “창업 당시 압구정로데오는 ‘한물 간 상권’이라는 인식 덕분에 임대료가 많이 쌌다. 저렴하게 나온 자리가 있어 선택하게 됐다. 당시 권리금이 1000만원이었는데 600만원까지 낮춰 들어갔다. 현재는 임대료가 많이 올라 권리금이 기본 1억원인 상가가 수두룩하다”고 회상했다.
코로나 팬데믹도 임대료 하락을 부추겼다.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높은 임대료를 고수하던 가로수길이나 강남대로, 청담, 신사역, 테헤란로 상권과 달리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대폭 낮췄다. 압구정로데오 인근 A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2019년까지 상권이 조금씩 살아나던 찰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거래량이 급감했다. 위기감을 느낀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낮추면서 공실마다 카페나 식당이 많이 입점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압구정로데오 상권 부활에는 ‘인기 매장’도 한몫했다. 인기 있는 브랜드들이 대거 입점하면서 유동인구 유입이 늘어났고, 트렌디한 매장이 다시 입점하는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업체가 ‘카페 노티드’를 운영하는 F&B 기업 ‘GFFG’다.
GFFG는 현재 운영 중인 9개 브랜드 매장이 모두 압구정로데오에 집결해 있다. 전국구 도넛 브랜드로 거듭난 ‘카페 노티드’를 비롯해 카페 노티드 매장 옆에 늘 단짝처럼 붙어 있는 수제버거 전문점 ‘다운타우너’, 압구정로데오 퓨전 한식 맛집으로 유명한 ‘호족반’, 미국 가정식 레스토랑 ‘리틀넥’, 뉴트로 스타일의 뉴욕 피자를 표방하는 ‘클랩피자’, 아메리칸 차이니즈를 내세우는 퓨전 중국집 ‘웍셔너리’ 등이다. 올해도 3개 브랜드 매장을 압구정로데오에 추가로 열었다. “압구정로데오에 ‘GFFG 유니버스’가 조성되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김기동 GFFG 최고운영책임자는 “이준범 GFFG 대표를 비롯해 본사 직원들이 수시로 방문해 매장 개선 사항을 점검해야 하다 보니 매장이 압구정로데오 한곳에 몰려 있으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며 “매장이 몰려 있는 덕분에 마케팅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최근에는 팝아티스트인 임지선 작가와 협업을 통해 매장마다 ‘대형 곰돌이 풍선’을 놓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반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또 다른 F&B 기업인 ‘CNP컴퍼니’도 비슷하다. ‘아우어베이커리 도산본점’을 비롯해 어묵튀김 떡볶이와 돈가스샌드로 유명한 ‘도산분식’ 후토마끼 맛집으로 소문난 일식당 ‘대막’ 등을 압구정로데오에 연달아 오픈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 밖에도 태국 현지 그대로의 맛을 살린 ‘까폼’, 돈가스 맛집 ‘카츠바이콘반’, 홍콩 길거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외관의 중식당 ‘벽돌해피푸드’, 미국 내슈빌 지역 소울 푸드로 유명한 ‘매운 치킨 버거’를 재현한 ‘롸카두들 내쉬빌’ 등 이국적 콘셉트를 살린 음식점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상권이 다채로워졌다.
현재 압구정로데오에서만 pp라운지·반반포차·피플더테라스·케이브 199 등 4개 매장을 운영 중인 차승원 피플더테라스 대표는 “가로수길 침체로 압구정로데오 유입 인구가 증가했고, 유명 브랜드 입점이 점차 늘어나면서 시너지가 확대됐다. MZ세대의 탄탄한 수요 덕분에 안정적인 매출을 거둘 수 있는 상권”이라고 설명했다.
▶압구정로데오 향후 전망은
▷다시 뛴 임대료, 좁은 상권은 리스크
압구정로데오가 현시점 가장 ‘핫’한 상권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좋은 분위기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지다.
다시 뛴 임대료가 가장 큰 리스크다. 지역 상인은 물론 부동산 관계자까지 이구동성으로 “압구정로데오 임대료가 예전보다 말도 못하게 올랐다”고 말한다. 과거 2000년대 압구정로데오가 쇠락한 원인이 ‘높은 임대료’였던 만큼, 또 다시 원주민이 몰려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압구정로데오 내 외식 업체 대표는 “압구정로데오 상권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퀄리티’ 좋은 매장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최근 임대료와 권리금 경쟁도 과열 양상을 띤다. 마치 ‘힙’한 매장들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느낌”이라며 “어쭙잖은 생각과 애매한 자본 규모로 압구정로데오 상권에 뛰어들면 낭패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상권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도 뚜렷하다. 압구정로데오 상권은 서편으로 가로수길, 동편으로는 청담동 거리와 맞닿아 있다. 모두 높은 임대료로 유명한 상권이다. 압구정로데오 열기가 인근 상권으로 확장되는 데 제한적인 입지인 셈이다. B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도산공원 남측 상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공실이 거의 없다. 운영 중인 가게가 더 비싼 권리금을 받고 되파는 ‘손바뀜’은 어느 정도 있는 편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한계가 있다”며 상권 확장성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하지만 과거처럼 상권이 단기간에 쇠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 중론이다. B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2000년대와 달리 압구정로데오에는 즐길 거리가 풍성해졌다. 신세계푸드에서 최근 선보인 대체육 정육점 ‘더 베러’를 비롯해 아디다스 팝업 스토어, 시몬스 팝업 스토어 같은 체험형 매장도 늘었다. 현재 인기가 거품이나 과열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나건웅 기자, 고혜영 인턴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70호 (2022.08.03~2022.08.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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