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위해 이름까지 바꾸었으나.. 이젠 자식들도 피해자 [납북귀환어부 이야기]

변상철 2022. 8. 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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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귀환어부 이야기] 경찰공무원 꿈 포기한 김팔용씨

[변상철 기자]

김팔용씨는 경상북도 울진이 고향이다. 특무대 출신인 아버지는 한국전쟁 영웅이었다. 아버지가 강원도 고성 아야진으로 발령받으면서 이곳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김팔용씨의 원래 이름은 김상태였다. 개명한 이유를 묻자, 아버지의 사업 때문이라고 했다. 사업하는 부친이 납북귀환어부 가족이 있다는 게 큰 부담이라며 이름을 개명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특무대 제대 후 주로 관급공사를 맡았던 부친으로서는, 아무래도 아들의 납북귀환 전력이 부담되었을 것이다.

김팔용씨의 가정은 다른 승운호 선원들에 비해 부유했다. 그러나 부친이나 모친이 용돈을 넉넉히 주거나 생활을 뒷받침해 주지 않아 개인적으로 늘 용돈에 목말랐다고 한다. 승운호를 타게 된 것도 사회 경험도 얻고 용돈벌이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렇게 탄 배는 납북이 되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경찰공무원을 꿈꿨다. 그러나 납북되어 돌아온 후 여러 차례 경찰 시험에 응시하려 했으나 '납북귀환어부'라는 것으로 인해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김팔용씨는 승운호 선원 중 김일관씨와 함께 미 정보부대의 조사를 받았다. 이 일로 다른 선원들은 김일관씨나 김팔용씨가 수사기관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고 온 것 아니냐고 오해하기도 했다. 김씨는 이번 기회를 통해 진실규명과 더불어 다른 선원들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으면 한다고 했다.

정부는 납북귀환어부를 환영해 주지 않았다
 
 1971년 고성 아야진 앞바다에서 오징어잡이 조업을 하다 납북된 뒤 1년여 만에 돌아온 승운호.
ⓒ MBC
김팔용씨는 1971년 8월 고성 아야진에서 어선 승운호를 타고 오징어잡이를 나갔다가 귀환 중 북한에 피납되어 1972년 9월 7일 속초항으로 귀항했다. 김팔용씨의 집은 부유했지만 이복자식이었던 그는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집에서 장사를 크게 했어요.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도 나한테는 용돈을 안 주더라고. 그러니 내가 화가 안 나겠어요? 한참 혈기 왕성할 때니까 속상하면 술을 마시고 여기저기 발길질을 하면서 난리를 피우고 그랬어요. 그럴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참으라면서 말리고는 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돈도 벌 겸 집에서 좀 떨어져서 사회 경험이나 쌓아야겠다고 배를 탔죠."

김팔용씨는 처음 경험하는 조업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조업하던 첫날은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했지만, 밤이 되자 짙은 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비바람은 옆 사람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셌고, 조업 역시 불가능해졌다. 함께 배를 탔던 선원 중 몇 명은 멀미가 심해 선실에 누워있을 정도로 파도가 심하게 몰아쳤다. 그렇게 밤 작업을 마치고 아야진으로 귀항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붙잡힌 것이다.
 
"날이 밝아 어수선한 소리가 나길래 갑판으로 나와보니 '까질이'라고 부르는 북한 경비정이 배로 다가오더라고요. 처음에 한 대가 왔어. 어뢰 같은 걸 싣고 저기서부터 물결을 치고 오더라고요. 처음에는 우리 남한 경비정인 줄 알고 마실 물이라도 좀 달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다니까요. 북한배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김팔용씨는 북한에서의 억류 기간을 1년 36일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북한에 억류된 뒤 금강산, 원산, 평양 등으로 옮겨 다니며 억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젊고 혈기 왕성했던 그는 어느 날 술을 잔뜩 마시고는 '왜 죄 없는 우리를 납치했느냐, 빨리 남한으로 내려보내라'며 항의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항의도 귀환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포로 신세의 김씨 일행은 1년 넘는 억류 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언제 귀환될지 모르며 하루하루를 견디던 어느 날, 북한 지도원으로부터 남한으로의 귀환이 결정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972년 9월 7일 귀환을 위해 원산에 도착해보니 환영 나온 북한 주민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귀환의 설렘으로 북한 주민의 환영식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어렵사리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납북귀환어부를 환영해 주지 않았다.

김씨를 비롯한 납북어부들은 귀환되자마자 속초시청에 집단 수용된 후 건너편 여인숙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김팔용씨를 조사한 사람은 방첩대 소속 수사관 2명과 강원도경찰국 보안과 수사관 1명이었다. 그들의 소속을 알게 된 것은 특무대 출신이었던 부친의 친구가 고성경찰서 정보과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과 형사의 지인이 있다고 고문 수사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사관 따라서 여인숙에 들어가면 여인숙에 있는 방 중 하나로 들어가요. 방문이 여닫이문이었는데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수사관이 대뜸 저에게 '들어와! 이 간나 새끼야. 무릎 꿇고 앉아!'하며 호통을 치는 거예요. 그리고는 장작으로 막 때리는 거야. 이미 여인숙에 들어갈 때부터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막 나는데 얼마나 겁이 나는지 몰랐어요. 완전히 겁에 질려서 하라는 대로 무릎을 꿇고 앉으니까 다짜고짜 무릎을 발로 짓밟더라고요. '이 빨갱이 새끼'이러면서요. 장작개비로 수도 없이 맞았어요, 그래서 다리 잔핏줄이 다 죽었어요. 그리고 고춧가루를 탄 물고문도 한 번 받았어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죽은 피가 여기 저기 뭉쳐서 수술을 다 했잖아요. 머리 수술도 했고."

자식들의 피해가 더 마음 아파
 
 1972년 9월 7일 귀환한 선박에 대한 조사를 위해 합동신문조를 구성. 총 책임지휘는 중앙정보부가 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변상철
 
고통스러운 구타를 더는 견디지 못한 김씨는 수사관에게 악을 쓰면서 덤볐다고 한다. '북한에 끌려가서 개고생하고 돌아왔는데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때리느냐'며 덤벼들자, 수사관들은 김씨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조사받는 방보다 조금 넓었던 그 방에는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앉아 있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은 김씨에게 당시 새로 나온 담배라며 '은하수'라는 담배를 권했다고 한다. 김씨는 건넨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서는 '상갓집 개만큼도 취급을 해주지 않는 게 말이 되냐, 내가 고향이라고 왔는데 이렇게 취급을 하느냐'며 항의했다. 그러자 그날 이후로 고문이 멈췄다고.

그렇게 일주일 정도 조사를 받고 나서 김씨는 양양의 물치비행장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에 있는 미군 부대로 이동했다. 미군 구치소에 있으면서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받을 때는 미군 수사관 1명, 보안대 조사관 한 명, 통역 등 3명이 조사했다고 전했다. 조사받았던 건물은 퀀셋(길쭉한 반원형의 간이 건물) 모양의 양철 건물이었고, 조사내용은 속초에서 받았던 내용과 동일했다. 문제는 중앙정보부에서의 조사였다.
 
"하루는 이문동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어요. 미군 부대에서는 구타를 당하지 않았는데 이문동에서 조사받을 때는 구타를 하더라고요. 구둣발로 차고. 속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고국이라고 찾아와서 이래도 밟히고 저래도 밟히고 이러니까요."

미군 부대 조사가 끝난 뒤 고성경찰서로 돌아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비좁은 유치장에서 생활하는 동안 유신(1972년 10월 17일)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신 선포 직후 구속이 되었고, 그 뒤로 검찰 조사와 법원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김씨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위반으로 처벌됐다. 김씨는 북에 납북될 당시 어느 지점에서 납북되었는지, 군사분계선을 월선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음에도 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게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난 경찰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경찰 시험을 보러 경기도 어디로 서류를 꾸며서 갔는데 이북 갔다 온 사람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시 남산터널 공사를 하던 서울의 대한공업사라는 회사에 취업하러 갔어요. 취업 이야기가 다 됐다고 해서 갔는데 공사 책임자가 날 부르더니 이북에 갔다 온 사람은 일할 수 없다며 안된다는 거예요.

그 뒤에 목동에 있는 모자공장에도 취업해 봤지만 금방 쫓겨났어요. 심지어 사방공사(토양 침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물 피복이나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는 공사)에도 서무계 직원으로 일하려고 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모든 생활을 감시당하고 살아야 했다니까요.

나만 그래요? 자식들도 취업이 안 되는 거야. 아들도 그렇고 딸도 그렇고 취업이 안되는 거야. 결국 아들은 조리사 시험을 봐서 자영업 식당을 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디 서류를 넣어도 받아주지를 않아요."

김씨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식들의 피해가 더 마음 아프다고 했다. 자신도 피해자이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로 연좌제 피해를 보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이라며 김씨는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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