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히만의 섬에서 벌어지는 예술가의 창작 분투기

김상목 2022. 8. 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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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베르히만 아일랜드>

[김상목 기자]

1_잉그마르 베르히만을 향해 폭발하는 '팬심'

2016년,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다가오는 것들>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던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의 차기작은 스웨덴의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그의 대표작들을 촬영한 곳이자 말년을 보낸 장소인 포뢰 섬에서 시나리오부터 촬영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진행한 작업이다. 이곳에서 <페르소나>를 비롯해 5편의 작품을 연출했고 2007년 별세 전까지 살았던 섬은 거장의 거대한 박물관처럼 인식될 정도다.

아마 국내에서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매니아 층이 아니라면 대개 포뢰 섬에 대한 인식은 김태용 감독이 배우 탕웨이에게 로맨틱하게 프로포즈한 바로 그 장소로 받아들여질 테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라면 어찌 그 섬에서 냉정하게 철벽을 칠 수 있으랴. 그런 포뢰 섬의 정취와 베르히만의 기억이 이 영화엔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내내 가득하게 넘실거린다.

영화는 감독들의 감독이라 할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에 대한 오마주와 헌사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실제 베르히만의 열렬한 팬으로 매년 이 섬에 들렀다던 감독의 팬심은 물론, 감독과는 사실혼 관계이던 올리비에 아사야스 역시 카이에 드 시네마의 평론가 출신 감독으로 정평이 난 만큼 이들 커플의 포뢰 섬에 대한 애착은 정평이 나 있던 사안이었다.

2_감독 자신의 삶을 투영한 중층구조 이야기
 
 영하 <베르히만 아일랜드> 포스터 이미지
ⓒ 찬란
 
영화는 삼중의 구조를 취한다.

첫째로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탄생 100주년 기념 다큐 <잉그마르 베르히만을 찾아서> (2019,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에 인터뷰로 참여할 만큼 진성 베르히만 팬인 미아 한센-러브 감독 본인의 팬심이 가득 담긴 포뢰 섬 소개 영상 가이드다. 직접 영화를 본다면 실감이 날 정도로 북유럽의 고즈넉한 섬마을 풍경이 이상화되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둘째로는 실제로 감독과 오랜 기간 커플 관계 유지해온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두 명감독 커플의 현실 공사 관계를 짐작케 하는 극중 두 주인공, 크리스와 토니의 관계 설정이다. 둘 다 인정받는 영화 작가이지만 공유지점 못지않게 차이도 적지 않게 가진 특수성을 미묘하게 변별해내는 섬세한 과정이 수반된다.

셋째로는 토니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에 애를 먹는 크리스의 각본 속에서 너무 일찍 시작하는 바람에 관계의 종말 직전에 처한 에이미와 조지프의 극중극 형태의 등장이다. 이렇게 잉그마르 베르히만 그림자와 감독 커플의 현재성, 그리고 극중 감독 '오너캐'임이 명백한 크리스의 시나리오 속 자기반영적 캐릭터가 연결되는 식이다. 꽤나 중층적인 복합 구조라 하겠다.

3_예술가의 창조적 긴장이 극중극으로 풀어지다

포뢰 섬의 실제 명소와 풍경이 차례로 소개되고 근사한 풍광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영화 초반에 부부는 예술가의 작업과 그들의 사생활을 대비해가며 격론을 벌이게 된다. 베르히만의 영화세계와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그의 사생활을 둘러싼 혼란에 직면한 크리스는 예술가의 창작을 위해 개인사는 희생되거나 도외시하는 것을 용인하는 토니와 베르히만 센터 사람들에게서 위화감을 느낀다.

부부 중 토니는 포뢰 섬에 잘 적응하는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센터 내 극장에서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도 참석하며 만족해한다. 시나리오도 잘 집필되는 듯 보인다. 센터의 공식 투어도 꼬박꼬박 잘 다닌다. 투어에서 만난 베르히만 팬들과 토론도 벌인다. 하지만 크리스는 시나리오 집필도 섬에서의 생활도 처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것 같다. 그녀는 혼란에 빠진 상태다. 영화 초반부터 사람들과 부딪혔던 예술가의 공적 영역인 창작과 사적 영역인 결혼과 육아 문제의 양립 관련해 크리스는 남편 토니처럼 자연스럽게 넘길 수가 없다. 그녀는 베르히만이 자연스럽게 기존의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 그것도 성공한 예술가로서 누렸던 허용범위를 용인하거나 따르기엔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베르히만을 향한 팬심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크리스의 혼란과 고민은 남편 토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대리적으로 발현되는 듯 진행된다.

영화의 중반부터는 명확히 중심이 크리스로 옮겨져 있다. 그녀는 이제 베르히만을 향한 자신의 깊은 애정을 재평가하는 것과 동시에 (실제 올리비에 아사야스와의 사실혼 관계처럼) 토니와의 동반자 관계에서 오는 간극, 즉 사적 반려자로서의 친밀함과 공적 예술가로서의 창조적 긴장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내야 하는 갈림길에 직면한다. 토니가 투어버스를 타고 '공식화'된 베르히만 투어를 즐기는 것에 비해 크리스는 충동에 의해 투어버스 일정을 펑크내고 베르히만에 빠삭한, 하지만 비정통적인 해석도 서슴치 않는 영화과 대학원생을 투어가이드 삼아 즉석에서 비공식 베르히만 투어를 감행한다.

이후 크리스와 토니의 포뢰 섬에서의 행보는 결정적으로 분리된다. 단독적 예술가로서 크리스의 치열한 홀로서기 탐구는 물론 토니의 여정처럼 순탄할 수 없다. 시행착오를 겪기 일쑤다.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비를 쫄딱 맞기도 한다. 자신이 어떻게든 극복하려 노력중인 베르히만의 양면성 중 부정적인 측면을 못 마땅해 하는 듯 섬 주민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당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시련과 당혹감 가운데에서도 크리스는 자신이 쓰려고 하는 이야기를 서서히 만들어나간다.

4_'극중극' 형식으로 묘사된 갈등의 승화와 해답 찾기
 
 영하 <베르히만 아일랜드> 영화 이미지
ⓒ 찬란
 
크리스는 토니에게 이제 자신의 시나리오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물론 토니는 동료적 관계로서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자신의 일 때문에 온전히 집중하진 못한다. (실제 감독 자신의 삶이 반영된 게 분명해 보이는) 남편의 태도에 곧잘 빈정이 상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완성은 단독자로서의 예술가 본인의 몫이다. 크리스는 오래 이어온 관계의 마지막 3일을 남겨둔 남녀의 사연을 풀어내기 시작하고, 화면은 영화 속 영화처럼 전환된다.

크리스가 들려주는 시나리오 속에선 너무 일찍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이미 한번 사랑에 실패한 에이미와 조지프가 주인공이다. 둘은 우연히 다시 만나지만 이미 각자에겐 다른 상대가 있고 둘 다 이를 포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의 간극은 여러 암시와 상징들로 묘사된다. 그들의 밀고 당기는 감정은 보는 이들에게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누구보다 더 끝이 궁금한 이는 바로 작가 자신이 아닐까?

영화는 여기에서 포뢰 섬이라는 영화광들에겐 마법이 가능할 것만 같은 명소를 판타지의 공간으로 천연덕스럽게 탈바꿈시킨다. 극중극 구조가 다시 한 번 비틀어지면서 시공간의 틈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감독만이 저지를 수 있는 창조적 혼란의 순간이다. 예술가의 창작의 고통을 반영하듯 토니가 일 때문에 섬을 떠나게 된 며칠간 크리스의 작업은 막바지로 진전된다. 이제 영영 놓아 보내야할 헤어진 전 애인과의 재회로 갈등에 휩싸인 에이미는 끊임없이 번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경우의 수를 놓고 저울질하는 계산 대신 순수한 충동과 관능에 휩싸인다.

에이미는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인 조지프에게 묻는 과정을 거듭한다. 작가 자신이 창작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에 부딪히는 것처럼. 그리고 스스로 포뢰 섬에 와서 직면했던 모순적 베르히만과 대면하는 과정을 회피하지 않고 도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술적 체험의 단계를 거쳐 크리스는 마침내 답을 찾는다. 예술가로서 자신이 시작한 작업의 완성과 한 인간으로서 반려자와 가족에 대한 태도의 정리, 그 지난했던 양립의 해결은 그녀 자신이 숙제풀이를 마치는 순간에 합일되어 깃든다. 이제야 처음 그들이 포뢰 섬에 들어설 때 꿈꿨던 완벽한 휴가가 완성된다.

5_영화로 떠나는 근사한 씨네 바캉스 체험
 
 영하 <베르히만 아일랜드> 영화 이미지
ⓒ 찬란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미아 한센-러브 감독(과 반려자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베르히만을 향한 존경심이 폭발하는 영화다. 그저 포뢰 섬을 배경으로 근사하게 활용하는 것을 초월해 자신들이 얼마나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라는 존재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단순히 팬심을 넘어 그를 좋아하기 위해 치열한 과정을 거쳤는지 제대로 선보이는 이야기다. 극중에서 크리스와 토니가 베르히만의 영화세계 독해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논쟁은 곧 감독 커플이 이미 수십 번 치렀을 내용의 지극히 간략한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의 베르히만 배틀을 기록영화로 보고 싶어질 만큼 그 내막에 관심이 갈 정도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포뢰 섬에 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영화 속 크리스와 토니가 누렸던 것처럼 섬의 극장에서 베르히만의 영화를 감상하고픈 욕구가 솟구친다. 영화광이라면 다른 건 모르겠고 그저 영화 곳곳에 감춰진 베르히만 보물찾기하는 기분으로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만끽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미아 한센-러브는 그것보다는 좀 더 나아간다. 영화 속에서 베르히만을 좋아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자기모순과 윤리적 고민의 조화로 향하는 고통스러운 여정은 곧 감독 자신은 물론 모든 영화광들이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 될 테다.

물론 그럼에도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에 비해 아주 보기 편하고 쉬운 영화다. 이야기 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지만 말이다. 스웨덴하면 떠오르는 명감독의 섬, 그리고 웬지 어울리는 켈틱 하프의 선율, 그리고 역시 스웨덴의 상징인 팝 그룹 아바(ABBA)의 '더 위너 테익스 잇 올 (The winner takes it all)'이 짱짱하게 퍼지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경험한 것처럼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순전하게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것들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테다. 무엇보다 감독이 정성스럽게 오마주한 것처럼,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베르히만의 영화들을 다시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작품정보>

베르히만 아일랜드 Bergman Island
2021|프랑스 외|드라마/로맨스
2022.08.04. 개봉|112분|15세 관람가
감독 미아 한센-러브
출연 빅키 크리엡스(크리스 역), 팀 로스(토니 역),
미아 와시코브스카(에이미 역), 앤더스 다니엘슨 리(조지프 역)
수입·배급 찬란
공동제공 소지섭, 51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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