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없이 또 늦추려 해" 피해자 '불참'에 삐걱대는 강제징용 민관협의회

박현주 2022. 8. 3. 16:4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논의를 위한 민관협의회에 참여 중인 피해자 측이 "외교부와 신뢰가 파탄났다"며 향후 협의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 전범 기업의 자산이 조만간 매각되면 한ㆍ일 관계가 얼어붙을 거란 우려에 외교부가 최근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가 갈등의 발단이 됐다.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앞에서 임재성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동원 민관협의회에 불참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외교부, 신뢰 완전히 저버려"


'일본제철ㆍ미쓰비시중공업ㆍ후지코시 상대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지원단'은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달 4일, 14일) 두 차례 민관협의회에서 피해자 측 의견을 이미 대부분 전달했다"며 "향후 회의에서 실효적인 의견도 나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불참을 통보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달 26일 외교부가 대법원에 미쓰비시 중공업의 국내 자산 매각 관련 의견서를 제출한 데 대한 항의 차원이다. 피해자 측은 이날 발표한 입장문에서 "과거 재판 거래의 공범이었던 외교부가 아무런 반성 없이 다시 강제 동원 집행 절차를 지연하려는 모습"이라며 "피해자에게는 매우 충격적이며 심각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앞서 외교부는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6년 강제징용 관련 의견서를 대법원에 냈다가 '재판 거래' 의혹에 휘말렸다.

이어 피해자 측은 "외교부 의견서 제출은 실질적으로 피해자의 권리 행사를 제약하고, 절차적으로도 신뢰를 완전히 저버리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피해자를 대리하는 임재성 변호사는 "(현금화) 집행 절차를 지연해 달라는 행정부의 입장을 사법부에 제출하는 건 피해자 권리 침해며, 이게 최소한 정당한 행위가 되려면 (피해자에게) 사전에 양해와 동의를 얻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법 자제' 요청했던 외교부


실제로 이상렬 외교부 아시아ㆍ태평양국장은 의견서 제출 이틀 후인 지난달 28일 광주를 찾아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 국장은 의견서 제출 사실과 요지를 전달했다. 다만 피해자 측은 "외교부의 설명이 뒤늦었을 뿐 아니라 이미 제출한 의견서의 전문조차 공개하지 않는다"고 항의하고 있다. 피해자 측은 대법원에 의견서 열람을 신청해둔 상태다.

외교부 당국자에 따르면 해당 의견서에는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 협의를 지속하고 있으며, 민관협의회 등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 측을 비롯한 국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 나가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ㆍ일 간 외교적 노력이 바쁘게 진행되고 있으니 일본이 양국 관계의 '레드라인'으로 삼는 현금화가 실현되지 않도록 사실상 '사법 자제'를 우회적으로 요청하는 메시지다.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미국에서는 국무부가 법원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아미쿠스 쿠리에'(법정 조언자 제도)가 활발하다"며 "한국도 법령, 절차에 따라 충분히 재판부를 향한 외교부의 의견 개진이 가능하며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건 외교부의 직무 유기"라고 말했다.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앞에서 임재성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동원 민관협의회에 불참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피해자 빠진 협의회…합의 '난망'


그나마 협의회에 참여해오던 피해자 측 인사들이 전격 불참을 선언하면서 민관협의회 자체도 삐걱댈 전망이다. 정부가 현금화 해법으로 유력하게 논의하고 있는 대위변제 방안도 결국 피해자 동의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협의회 사정에 밝은 한 외교 소식통은 "앞선 회의에서도 참가자들이 각자 할 말만 하다 보니 접점을 찾기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며 "오는 15일 광복절까지 뚜렷한 해결책을 강구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3일 피해자 측 불참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달 중 이른 시일 내에 3차 민관협의회 개최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민관협의회를 통해 원고 측을 비롯한 국내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앞서 대법원은 2018년 10월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에, 이어 같은 해 11월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해 강제징용 피해자에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미쓰비시 중공업의 경우 법원의 국내 자산 매각 명령에 불복해 지난 4월 대법원에 재항고한 상태인데 이르면 한두달 내에 대법원이 재항고를 기각하면서 실제 매각, 즉 현금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예상이 법조계에선 나온다.

임박한 현금화에 대해 피해자 측은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따른 '권리 실현'으로, 한ㆍ일 정부는 반드시 막아야 할 사실상의 '시한폭탄'으로 바라보면서 양측 인식의 본질적인 간극을 좁히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