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담(手談)] 조치훈 투혼이 일깨운 승자의 자세

류정민 2022. 8. 3. 11:11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목숨을 걸고 둔다." 조치훈 9단은 '투혼'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바둑 기사다.

세계 바둑사에 각인된 '휠체어 대국'은 조치훈의 삶을 상징한다.

조치훈은 바둑의 기본에 천착했다.

승자인 고바야시도 패자인 조치훈을 향해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86년 '휠체어 대국', 투혼의 승부 상징
한판 나눈 상대 존중, 진정한 승자의 길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목숨을 걸고 둔다." 조치훈 9단은 ‘투혼’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바둑 기사다.

승리에 대한 열망이 남다른 탓으로 봐야 할까. 그런 세속의 잣대로는 승부사 조치훈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졸장부’가 넘쳐나는 세상. 조치훈은 시류에 역행하는 사내였다.

세계 바둑사에 각인된 ‘휠체어 대국’은 조치훈의 삶을 상징한다. 1986년 1월29일, 일본 시마네현 마쓰에시. 요미우리신문 주최, 일본 바둑 서열 1위 대회인 ‘기성전(棋聖戰)’ 제2국.

조치훈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대국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생사의 고비를 겪었던 인물의 등장은 그 자체로 뉴스였다. 조치훈은 대국을 앞두고 전치 3개월이 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 다리는 골절됐고, 왼팔도 골절돼 깁스한 상황.

조치훈 9단. [사진제공=한국기원]

의사는 절대 안정을 권했다. 하지만 조치훈은 만류를 뒤로한 채 반상 앞에 앉았다. 온몸에 스며드는 고통을 감내하며 대국에 임하는 건 무리였다.

기성전은 7번기로 진행해 4승으로 승자가 가려진다. 제한 시간은 각자 8시간, 두 기사에게 할당된 시간은 16시간에 달한다. 초읽기 시간까지 고려하면 바둑 한 판에 20시간이 넘는 혈투다. 2일에 걸쳐 한 판을 둔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바둑은 돌 하나의 선택을 놓고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 착점에 이른다. 조치훈은 소문난 장고(長考)파다. 무려 3시간을 고민한 끝에 단 한 수를 놓은 경험도 있다. 그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는 끊임없는 계산이 이뤄진다.

착점 이후 전개될 예상도도 그린다. 상대 응수에 따라 예상도는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를 만든다. 머릿속으로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그리는 과정의 반복. 이는 엄청난 체력의 소모와 정신적 고통을 동반한다.

몸 상태를 이유로 기권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조치훈은 바둑의 기본에 천착했다. "나에게는 오른손이 있다."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그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그의 도전 정신은 동료 기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조치훈이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최고 권위 바둑 대회에 대한 예우다. 그리고 상대(고바야시 고이치 9단)에 대한 존중이다. 그해 기성전 제2국에서 보여준 조치훈의 투혼은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조치훈은 제2국에서 3집 반 승리의 대역전 드라마를 썼다. 그러나 남은 대국에서 체력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그해 기성전 타이틀은 고바야시가 가져갔다. 하지만 역사에는 조치훈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더 깊이 각인됐다.

승자인 고바야시도 패자인 조치훈을 향해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당신이 진정한 승자라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바둑에서는 패자가 승자보다 더 가치 있는 평가를 받을 때가 있다.

그날 조치훈의 모습은 이 세상의 메커니즘에 관한 되물음을 우리에게 남겼다. 승자 독식의 세상에 대한 고찰(考察)에 관해…. 승자가 됐다는 결과에 취해 우쭐대는 모습은 졸장부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한 판의 승부를 나눈 상대를 향한 존중의 자세를 견지하는 모습. 승자의 자세가 그러해야 진정한 승리에 이르지 않겠는가.

류정민 문화스포츠부장 jmryu@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