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반도체 때리기에 美는 왜 '28나노·14나노' 언급했나[美, 中반도체 정밀타격]
[아시아경제 정현진 기자] 미국이 '반도체 굴기'에 속도내는 중국을 정밀 타격하고 있다. 중국이 레거시(구형) 공정을 바탕으로 반도체 기술력을 키우고 시장에서는 점유율을 넓히며 자리를 잡아가자 미국은 현미경을 들이밀며 세부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올가미를 점차 확대해 나가고 있다. 최근 미 의회 문턱을 넘어선 '반도체지원법'에 28나노미터(㎚·1㎚=10억분의 1m)라는 구체적인 중국 견제 조건을 내걸고, 자국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반도체 장비와 관련해 14나노와 같은 새로운 수출 규제 조건을 내놓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 트럼프 '때리기'에도…中반도체 산업은 성장세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집권 초부터 중국 반도체 산업을 공격해온 배경에는 중국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이 있다. 중국은 2010년경부터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들을 내놓았고 2015년 '중국 제조 2025'를 통해 2020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40%, 2025년까지 7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놓은 바 있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는 첨단 반도체에 초점을 맞춰 중국 반도체 기업을 블랙리스트에 지정하고 이에 필요한 장비나 부품을 쉽게 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원하는 속도대로 성장하기는 쉽지 않았고 지난해 서방 외신들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좌초됐다는 평가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속도를 내지 못한다던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세가 눈에 띄게 힘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첨단 공정을 중심으로 제재를 퍼붓는 동안 우회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 레거시 분야에서 집중했고 이를 바탕으로 점차 기술력도 키워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주요 플레이어로 등장, 발을 넓혀나가고 있어 미 정부로서는 자국 기업이 다치지 않도록 하면서 중국이 성장하고 있는 분야를 정밀 타격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트럼프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중국 파운드리 업체 SMIC는 레거시 공정을 주력으로 해 지난해와 올해 1분기 사상 최대 매출 기록을 세웠다. 최근에는 SMIC가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조치를 뚫고 7나노 공정 개발에 성공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SMIC를 포함한 중국 파운드리 업체의 세계 점유율은 올해 1분기 사상 처음 10%를 돌파했다.
중국의 메모리반도체 기업으로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성장세를 보이는 YMTC는 아직 국내 업체들도 양산하지 않고 있는 232단 3차원 낸드를 올해 말 양산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황이다. 당초 올해 말로 계획했던 192단 낸드 양산은 중단한 상황에서 176단 낸드 양산 경험 조차 없는 YMTC가 허풍을 떠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으나 성장세를 보면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시장에서는 보고 있다. 미국 애플이 아이폰용 낸드를 YMTC에서 공급받을 수도 있다는 보도가 최근 나올 정도로 기술력이 향상된 것으로 보인다.
◆ '28나노 이하 금지' 美반도체지원법미국 하원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통과시킨 '반도체 칩과 과학 법', 즉 반도체지원법에 가드레일 조항을 포함시킨 것도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을 타깃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이란 단어가 11차례나 언급되는 이 법은 미국에 반도체 제조시설을 짓는 기업에 520억달러(약 68조원) 규모의 지원금이나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하는데, 지원 자격 요건에 제한을 뒀다.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은 중국을 포함한 '해외 우려 국가(foreign country of concern)'에 향후 10년간 첨단 반도체 시설을 짓거나 기존 시설에 추가로 투자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공장의 경우 레거시 공정이라고 해서 28나노 이상의 성숙 공정을 적용한 반도체를 생산하는 곳은 예외로 둔다는 조항이 담겼다. 사실상 중국에서 28나노 미만의 공정은 막겠다는 메시지를 준 것으로 풀이된다.
1나노는 반도체 회로 선폭을 의미하며 이 선폭이 줄수록 정보처리 속도가 빨라진다. 미국이 언급한 28나노 이상 공정은 구형 공정으로 자동차, 전장 등을 제어하는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자동차·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에 쓰이는 전력공급장치 반도체 등이 이 공정으로 만들어진다. 컨설팅 기업 IBS에 따르면 2025년까지 중국이 세계 28나노 반도체의 40%를 생산할 것으로 전망될 정도로 레거시 공정에 집중하고 있다.
클론 키친 미국기업연구소(AEI) 수석연구원은 이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한 날 글을 통해 "28나노는 현 공정 수준의 20년 뒤쳐진 공정"이라면서 현재로서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반도체 생산 제한은 5나노 생산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수출 금지를 위한 바세나르 협약 뿐이어서 28나노 제한이 생기면 훨씬 큰 제약이 생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앞서 법안 통과 이전인 지난달 18일 인텔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가 '28나노'라는 구체적인 수치보다는 법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표현을 수정할 수 있도록 로비를 벌여왔다는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으나 결국 이 조항이 그대로 포함됐다. 보도 이후 카린 장 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이 "강력한 가드레일을 지지한다"는 언급을 한 것으로 보아 업계가 바랐던 경제적 이익보다는 국가 안보 차원에서 중국의 반도체 산업 확대 견제를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강력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 中에 반도체 장비 유입 막아라미국은 제조시설의 핵심인 반도체 장비도 중국에 유입되지 않도록 막는 방안을 속속 내놓고 있다.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미국의 점유율이 40%가 넘어 미국이 이를 막는다면 첨단 장비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점유율 30%대로 반도체 장비 시장 2위인 일본도 미국의 대중 압박에 가세하고 있는 상황이다. 장비 기술이 부족한 중국은 전체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큰 손'으로 통하지만 미국의 견제가 점차 목을 조여오고 있는 것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 1분기 반도체 장비 매출액이 75억7000만달러로 1위를 기록했다. 앞서 중국은 2020~2021년 2년 연속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매출 국가였다.
미국이 중국 유입을 막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반도체 장비는 바로 EUV 장비다. 첨단 공정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장비로 이 장비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전 세계에서 네덜란드 업체 ASML가 유일하다. 삼성전자와 TSMC, 인텔 등 주요 반도체 기업이 돈을 싸들고 줄을 설 정도로 수요가 높다. 미국은 트럼프 전 행정부부터 네덜란드 정부 관계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ASML의 대중 수출 허가를 내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수출 제한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해 아직까지 이 제한이 풀리지 않고 있다.
지난달 초에는 미국이 EUV 장비의 구형 버전인 심자외선(DUV) 노광장비까지 중국에 수출하지 말아줄 것을 네덜란드에 로비하고 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다. 현재 메모리반도체에서는 90% 이상이 DUV 공정을 채택하고 있고 중국이 메모리반도체에 집중하고 있는 만큼 이 장비로 반도체 시장 점유율 확대를 막기 위해 나선 것이다. 이 장비는 일본 니콘에서도 같은 장비를 만들고 있어 지난 6월 대중 판매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미 상무부는 최근 2주 새 램리서치와 KLA 등 자국 반도체 장비 업체에 14나노 공정보다 미세한 제조기술을 적용한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블룸버그는 지난달 29일 보도했다. 기존에 트럼프 전 행정부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린 SMIC에 미 반도체 장비 업체가 10나노 이하 공정용 장비를 팔 경우에는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던 점을 고려하면 제한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이제는 메모리반도체인 낸드 장비까지 미국의 올가미가 확대될 전망이다. 미국 정부는 중국에 있는 낸드 제조 공장에 들어가는 미국산 반도체 장비의 출하를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중 128단 이상의 낸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반도체 장비의 수출이 금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128단 이상의 낸드 생산에는 미국의 램리서치와 어플라이드머티리얼의 반도체 장비가 주로 사용된다. 앞서 백악관은 지난해 6월 보고서를 통해 자국 낸드 생산 업체인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이 YMTC의 저가공세로 인해 낸드 시장에서 가격 압박을 받고 있다면서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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