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팔자, 창이 바꾼다 [빈부격,창③]

최은희 2022. 8. 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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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서는 창의 숫자로 세금을 매겼다. 창은 곧 부의 상징이었다. 그 후로 500여 년이 흐른 지금, 유럽에서 약 8900km 떨어진 한국은 어떨까. 어쩌면 여전히, 창이 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있지 않을까. “창 있는 방은 26만 원, 없는 방은 18만 원” 창은 곧 돈. 사람이 살아선 안 되는 공간에서조차 돈에 따라 삶의 등급이 나뉘고 있었다.
쿠키뉴스 특별취재팀은 지난 6월부터 두 달간 서울·경기 지역의 고급주택과 아파트, 다세대 주택, 고시원, 쪽방을 돌며 이곳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를 통해 얻은 각종 데이터를 바탕으로 창에 비친 삶의 격차를 조명한다. 이번 기획을 통해 우리 사회가 창 없는 삶을 생각하고, 이들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자주]



그래픽=이해영 디자이너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에 사는 임백수씨가 더위를 피해 골목길에 나와있다.  사진=민수미 기자 

오전 5시

임백수씨 : 뜨겁고 무거운 공기에 눌려 한 남자가 눈을 뜬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에 사는 임백수(66)씨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지만, 3.3㎡(1평) 방은 한증막에 가까워졌다. 끈적해진 살갗 위로 땀이 배기 시작했다. 80㎝폭의 나무 단창은 열지 못한 지 오래다. 그곳을 통해 들어오는 바퀴벌레 때문이다. 하나 있는 창을 결국 임씨 손으로 막았다. 수면시간은 평균 두세 시간. 두 눈은 충혈되어 있고 정신은 몽롱하다. 깊게 잠든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곳은 불면 지옥. 숨통을 옥죄는 열기에 못 이겨 임씨가 거리로 나섰다.

경기 용인시 아파트에 사는 김명구씨가 창밖을 바라보며 운동하고 있다.   사진=최은희 기자 

김명구씨 : 수면 모드로 맞춰놓은 에어컨이 꺼진 시각. 157.36㎡(51평) 아파트에 사는 김명구(가명·60)씨가 곤히 잠들었다. 방에는 냉기가 여전하다. 침실 창에는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져 있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가린 김씨, 오늘은 늦게까지 잘 생각이다.

임씨가 사는 쪽방 내부. 바퀴벌레가 들어오는 탓에 복도로 난 나무 단창을 막아놨다.  사진=박효상 기자

오전 9시

임씨 : 낡은 전동휠체어에 앉아 거리를 응시한 지 4시간째. 동네 한 바퀴 걷고 싶지만, 이제는 가벼운 산책조차 힘들다. 열 걸음만 걸어도 가쁜 숨이 터져 나온다. 쪽방의 삶엔 뭐든 가속도가 붙었다. 경제도 건강도 악순환의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빠르게 돌았다. 창 없는 방은 그의 폐병을 심각하게 했고, 아픈 몸은 창 없는 방에서 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이자도 붙었다. 어둡고 습기 찬 이곳에 들끓는 벌레와 곰팡이 탓에 피부병이 생겼다. “병원비가 한 달에 30만 원이나 들어가. 차라리 잠들고 나서 눈을 안 떠야 하는데. 자꾸 눈뜨니까 골치가 아파” 뼈마디 앙상한 임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 한 아파트. 3.5m 폭의 통창이 거실에 설치돼있다.   사진=박효상 기자

김씨: 일어난 김씨가 온 집안의 창을 연다. 개수는 총 11개, 가장 큰 창의 폭은 3.9m에 달한다. 초록빛 풍광이 넓은 창을 가득 채웠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신선한 아침 공기가 폐부까지 들이찬다. 김씨가 팔, 다리를 뻗어 몸을 풀었다. 창밖을 보며 맨손 체조를 하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한 쪽방. 빛이 들지 않아 종일 어둡다.   사진=박효상 기자

오후 12시

임씨 : 임씨가 방에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줄을 서 받아 온 도시락이 있었다. 뚜껑을 열자 김치 냄새가 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환기할 방법은 복도로 연결된 문을 여는 것뿐이다. 힐끗힐끗, 열린 문틈 사이로 수많은 눈이 바닥에 앉아 밥 먹는 임씨를 엿본다. 방안에 널어놓은 속옷을 슬쩍 치운다. 돈이 없다고 지키고 싶은 것마저 없을까. “방문을 활짝 열 수가 없어. 문고리에 끈을 걸어서 열어놓는 정도지. 이런데 산다고 부끄러움이 없는 게 아니야” 임씨의 어깨가 점점 움츠러든다. 집에서 겪는 어려움으로 사생활 침해를 호소한 빈곤 주거 비율은 19.5%. 일상마저 지킬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이기도 하다.

경기 광주시 오포읍 한 고급 단독주택. 탁 트인 창밖으로 숲이 보인다.   사진=박효상 기자

김씨 : 가족과 외식하러 나온 김씨. 메뉴는 백숙이다. 더울수록 잘 먹어야 기운이 난다는 얘기와 함께 접시 위에 큰 닭 다리가 놓였다. 내심 집에서 편하게 먹었으면 했지만, 아내는 누가 이 더위에 백숙을 끓일 거냐며 눈을 흘겼다. “소파에 편히 앉아 있는 사람은 모른다”, “누워서 창밖 구경하고 있으면 끝이냐” 아내의 핀잔이 이어졌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김씨는 이내 사과했다.

임씨와 김씨의 우울 진단 결과표. 쿠키뉴스 특별취재팀이 빈곤 주거 거주자 30명을 대상으로 우울·스트레스 척도 진단 면접조사를 진행한 결과, 임씨가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사진=최은희 기자

오후 2시 30분

임씨 : 햇살이 골목을 메운 한낮, 임씨는 그늘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는다. 기온이 33도가 넘어갔지만, 볕이 들지 않는 방보다는 낫다. 어두운 곳에 홀로 앉아 있으면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과거 행복했던 기억도 무용지물. 생각의 끝은 어렵게 끊은 술에 가 닿았다. 삶에 대한 회의는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우울·스트레스 척도 진단 면접조사에 답하던 임씨가 낮게 읊조렸다.

우울은 전염병처럼 퍼져있었다. 동자동 주민 김모씨는 비가 내리면 빛 한 줌 들지 않는 쪽방에서 술을 마신다. 낮, 밤을 알 수 없어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최모(61·여)씨, 고통을 떨치지 못해 손목에 상처가 남은 양모(64)씨. 같은 조사에 응한 빈곤 주거 가구 30명 중 정상 범위에 있는 이는 단 2명. 중증 17명, 심각은 9명에 달했다. 대다수 심각한 스트레스 상태에 놓여 있었다.

4층으로 이루어진 광주시 오포읍 한 고급 단독주택. 창의 개수는 34개, 가장 큰 창의 폭은 3.8m에 달한다.   사진=박효상 기자

김씨 : 김씨의 남향집은 해가 잘 든다. 넓고 탁 트인 창 덕분에 전등을 켜지 않아도 환하다. 집과 그의 마음에 그늘이 파고들 틈은 없다. 물론 김씨에게도 스트레스는 있다. 끝없는 업무, 얽혀 있는 사내 관계에 머리가 복잡하다. 그렇지만 집에서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열어둔 창에서 살랑바람이 들어온다. 김씨가 독서하며 마음을 내려놓는다.

창신동 한 쪽방. 복도로 난 작은 창이 있긴 하지만, 천장 가까이 달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불을 끄면 사람 형체도 잘 보이지 않는다.   사진=박효상 기자

밤 12시

임씨 : 거리에서 15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임씨. 문을 굳게 잠근다. 창 없는 방에서 문은 유일한 환기구이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더워 문을 열고 잠들었다가 좀도둑에게 3번이나 당했다. 한 달 생활비 30만원을 몽땅 뺏긴 적도 있다. 금품갈취·절도를 당한 빈곤 주거 비율은 2020년 18.1%에 달한다. 5명 중 1명꼴이다.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도 임씨의 걱정 중 하나다. 과열된 선풍기에 불이라도 날까 늘 불안하다. 어둑한 복도를 헤치고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야만 건물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종종 뉴스로 들려오는 고시원 화재 참사는 남 일이 아니다. 잠들기 직전까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몸도 마음도 지친 임씨가 방바닥에 죽은 듯이 눕는다. 눈을 감아도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 빛 한 줌 없는 공간에서 시간은 남들보다 더 더디게 흐른다.

인천 송도의 한 아파트. 큰 창 안에 붉은 석양이 내려앉고 있다.   사진=민수미 기자

김씨 : 일기를 쓰며 내일 하루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의 내일은 오늘만큼 무탈할 것이다. 하나만 보려던 유튜브 영상이 다섯 개로 늘어났다. 시간은 어느덧 열두 시를 넘겼다. “내일 지각하면 어쩌지” 김씨의 혼잣말에 곁에 있던 아내가 창을 가리켰다. 아파트 정원등이 은은하게 방을 비췄다. ‘내일 아침 밝은 햇살에 절로 눈뜰 수 있겠지’ 김씨는 걱정 없이 잠에 들었다.








최은희 기자 joy@kukinews.com

도움 한국언론진흥재단-세명대 기획탐사 디플로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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