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이 소개한 '추석 없는 마을' 순천에 있다
[이돈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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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사적지 ‘형제묘’ 표지판에 그려진 그림. 여수 만성리 학살 현장을 표현하고 있다. |
ⓒ 이돈삼 |
희생자는 모두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이다. 신분이 민간인이든, 군인이나 경찰이든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희생자 가족들은 그동안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했다. 보호는커녕 유린을 당하고도 마음 놓고 아픔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빨갱이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슬픔을 속으로 달래야 했다. 정확한 피해 조사와 함께 진실 규명, 명예 회복이 시급한 이유다.
특별법이 제정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여순사건의 현장을 찾아간다. 여순사건은 그동안 14연대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렸다. 공식 명칭은 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린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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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오동도의 여순사건 기념관에 있는 ‘손가락총’ 조형물. 손가락총은 당시 민간인 학살의 상징물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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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신월동 한화여수공장에 있는 일제강점 때의 방공호. 이 자리는 당시 14연대의 주둔지로, 여순사건의 발발지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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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은 제주 4․3에 대한 진압 출동명령을 거부한 데서 시작됐다. 여수는 당시 사건의 중심지였다. 1948년 10월 19일 밤 14연대 군인들이 제주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봉기를 했다. 나아가 동족 살상 거부,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그때 14연대 주둔지가 여수시 신월동, 지금의 한화 여수공장 자리다.
여수시내는 전역이 비극의 현장이었다. 봉기군을 몰아낸 10월 27일부터 진압군과 경찰은 시민들을 가까운 운동장으로 모이게 했다. 강제 집결지는 서국민학교와 동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현재 중앙초등학교) 그리고 미평동과 국동의 넓은 공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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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만성리 바닷가에 세워진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정부 차원의 위령비 하나 없는 시절, 여수시가 여순사건유족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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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동 로터리광장도 역사의 현장이다. 봉기군이 여수를 점령했을 때는 인민대회장으로 활용됐다. 과거 친일을 한 천일고무공장 설립자 김영준과 우익인사들이 여기에서 사형을 당했다. 진압군의 세상에선, 그때 인민재판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민간인이 즉결 처형됐다.
종산국민학교도 학살지로 꼽힌다. 당시 김종원이 이끈 5연대가 종산국민학교에 경찰과 함께 주둔했다. 진압군이 좌익에 협조한 사람들을 찾아내고 즉결처분을 자행했다. 김종원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광란에 가까운 학살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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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의 뒷면. 위쪽에 ‘1948년 10월 19일’, 중간에 ‘……’, 아래쪽에는 비석을 세운 날짜 ‘2009년 10월 19일’만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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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여순사건유족회와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요청을 받아들여 여수시가 세웠다. 비문 뒤쪽에 점 여섯 개만 찍혀 있다. 여순사건에 대한 군경과 민간인 희생자 사이의 의견이 엇갈려 위령비의 이름과 설명문, 추모시를 새기지 못했다.
비신 앞에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은 위쪽에 '1948년 10월 19일', 중간에 '……', 아래쪽에는 비석을 세운 날짜 '2009년 10월 19일'이라고만 새겼다.
위령비에서 가까운 데에, 형제묘도 있다. 시신을 찾을 길 없던 유족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끼리 이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고 '형제묘'라 이름 붙였다. 여기 비문도 가족의 행적을 알리고 싶지 않은 유족이, 새로 판을 덧대어 가려 놓았다.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여순사건의 아픔을 희생자 위령비와 형제묘에서 확인한다. 오동도에는 여순사건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여순사건의 전개 과정과 피해 상황 등을 알아볼 수 있다. 당시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영상도 볼 수 있다. 압권은 '손가락총' 조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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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만성리 바닷가에 세워져 있는 형제묘. 시신을 찾을 길 없던 유족들이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끼리 이제라도 형제처럼 지내라는 의미로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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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팔마체육관에 세워져 있는 ‘여순항쟁탑’. 위아래로 갈라진 돌의 모양이, 좌우 이념대립과 국토분단을 상징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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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는 팔마체육관에 '여순항쟁탑'이 있다. 항쟁탑은 위아래로 갈라진 돌의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좌우 이념 대립과 국토 분단을 상징하고 있다. 위로 뻗은 여러 형상의 돌은 희생자의 넋과 통일 의지를 나타낸다. 여순사건의 개요를 적은 돌비석도 함께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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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사적지 가운데 하나인 순천 장대다리. 이곳 동천 제방은 봉기군과 경찰이 처음으로 싸웠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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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다리(순천교, 동천 제방)는 봉기군과 경찰이 처음으로 싸웠던 곳이다. 옛 순천경찰서는 봉기군이 경찰과 우익을 처형하고, 나중엔 경찰이 좌익과 협력자를 찾아내 죽인 곳이다. 당시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는 진압군의 주둔지로, 많은 시민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학살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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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신전마을 앞 노거수. 신전마을은 도올 김용옥이 해방과 제주4·3, 여순민중항쟁을 다룬 자신의 책에서 ‘추석이 없는 마을’로 소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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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과 학살의 이유는 다양했다. 군경 또는 군경의 가족이라고, 봉기군에 비협조적이라고, 14연대나 빨치산에 가담하거나 협조했다고, 14연대 군인 가족과 좌익의 가족이라고 죽임을 당했다. 마을사람들 사이의 원한에 의한 무고, 보복성 고발 등으로 희생된 사람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아무도 여순사건을 얘기하지 않았다.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피해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살아야 했다. 지역주민들의 피해의식도 컸다. 자식들한테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나서지 마라'고 가르쳤다.
물론 '이제 와서 아픈 과거를 굳이 들춰내냐'며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만큼 발전한다'고 했다. 과거를 기억하고 아픔을 말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역사에 함께 한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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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오동도에 들어선 여순사건 기념관. 지난해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기존의 여수엑스포 홍보관을 개보수해 기념관으로 꾸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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