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재 통역 화제의 교수, 한국말 비결은 "하숙집 아줌마 수다"

피주영 2022. 8. 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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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잘하는 것도 아닌데요. 요즘 한국엔 저보다 한국어 잘하는 외국인들 널렸잖아요.(웃음)"

김민재의 나폴리 첫 기자회견 통역을 맡은 안드레아 데 베네디티스(오른쪽) 교수. 사진 나폴리 트위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안드레아 데 베네디티스(44) 나폴리동양학대 교수의 한국어는 유창했다. 겸손한 말투와 흠잡을 데 없는 발음 덕분에 이탈리아인이 아닌 토종 한국인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데 베네디티스 교수는 최근 축구 팬 사이에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지난달 31일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의 나폴리에 입단한 국가대표 수비수 김민재(26)의 첫 기자회견 통역을 맡으면서다. 김민재는 지난달 27일 나폴리 선수가 됐다.

김민재는 나폴리 주전 수비수로 기대를 모은다. 덕분에 이날 기자회견에선 시작과 동시에 취재진의 질문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이탈리아어를 못하는 김민재는 쉴 새 없는 질문 공세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때 데 베네디티스 교수가 나섰다. 그는 마이크를 한켠으로 치운 뒤, 차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폴리 팀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본인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지" 등 간결한 문장으로 질문을 통역했다. 김민재가 핵심만 답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데 베네디티스 교수의 노련한 대처로 김민재는 약 20분간 이어진 인터뷰를 막힘없이 마쳤다. 기자회견 영상이 온라인을 통해 공개되자, 축구 팬은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선보인 통역에 큰 관심이 쏠렸다. 통역의 정체가 데 베네디티스 교수라는 것이 밝혀지자, 팬은 "이탈리아인 가면을 쓴 한국 사람 아니냐" "교수였다니, 축구단 통역 중 가장 스펙이 좋을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큰 기대를 모으며 나폴리에 입단한 국가대표 수비수 김민재. 사진 나폴리 SNS 캡처

데 베네디티스 교수는 1일 전화 인터뷰에서 "지인이 내 통역을 본 한국 네티즌의 반응을 보내줬다. 기대 이상으로 칭찬과 격려를 해줘서 너무 감사하다. 사실 나는 기자회견 내내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그는 나폴리 구단으로부터 통역 제안을 받았을 때 망설였다고 했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서다. 결국 나폴리 광팬인 가족 성화에 등 떠밀려 수락했다.

데 베네디티스 교수는 "이탈리아인으로는 드물게 축구를 안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축구 경기를 본 게 10년 전"이라면서 "전문 지식이 부족해 괜히 선수의 말을 잘못 전달했다가 나쁜 인상만 주고 망신당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나폴리의 열혈 팬인 가족이 '나폴리 선수 통역을 할 기회를 날리면 가만 안 두겠다'며 협박하는 바람에 통역을 맡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의 친정팀으로 유명한 나폴리는 이탈리아 구단 중에서도 축구 열기가 뜨거운 도시로 꼽힌다.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축구 도시 나폴리. [EPA=연합뉴스]

그는 이어 "평생을 이탈리아에서 한국학과 한국사를 연구하고도 한국에서 큰 주목을 못 받았는데, 나폴리에 입단한 한국 선수 통역을 딱 한 번 맡았더니 유명해졌다. 기분이 씁쓸하면서도 좋다. 전 세계가 열광하는 축구의 힘을 느꼈다"고 말했다. 데 베네디티스 교수가 김민재의 전담 통역을 맡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는 "구단의 제안은 일회성이었다. 게다가 나는 현직 교수라서 강의 일정이 있다. 하지만 통역이 아니더라도 김민재의 이탈리아어 과외 선생님은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40대의 젊은 학자 데 베네디티스 교수는 이탈리아에서 알아주는 '한국통'이다. 이탈리아의 한국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고교 시절부터 한국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나폴리동양학대에 다니던 2000년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한국으로 건너가 경희대에서 1년간 공부했다. 유창한 한국어는 이때 다졌다. 데 베네디티스 교수는 "당시엔 휴대폰도 인터넷도 드물었다. 수다스러운 하숙집 아줌마가 그의 훌륭한 한국어 선생님이었다. 매일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하면서 듣고 말하는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이후엔 한국 문학을 공부하며 어휘력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잊지 못한다. 이탈리아에서 월드컵을 보는데, 16강에서 한국이 연장 접전 끝에 이탈리아를 2-1로 이겼다. 그는 "친구들은 한국이 얄밉다며 난리가 났는데, 나는 속으로 좋아했다. 한국은 이미 '제2의 조국'이었다. 무엇이든 한국이 이탈리아보다 잘하면 나에겐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연구실에서 직접 집필한 인기 한국어 교재와 소설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책을 든 데 베네디티스 교수. [연합뉴스]

이후엔 한국 고대사까지 연구 영역을 넓혔다. 나폴리동양학대에서 '신라 화랑도 연구'로 석사를, 로마 라사피엔차대에서 '고구려 벽화에서 본 고구려인의 생사관'이라는 논문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을 평생 업으로 삼은 그는 2011년 카 포스카리 베네치아대에서 교단에 처음 섰고, 2018년 지금의 나폴리동양학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인기 한국어 교재도 집필했다. '린구아 코레아나(Lingua Coreana·한국어)'라는 제목으로 4권까지 출간했다. 그는 한국 문학을 현지에 소개하는 전문 번역가로도 활약 중이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김영하의 '빛의 제국'·'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살인자의 기억법', 황석영의 '바리데기'·'한씨연대기'·'낯익은 세상'·'개밥바라기별' 등의 작품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9월엔 그가 번역한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현지에서 출간된다.

최근 K팝과 K드라마 등 한류의 영향으로 요즘 이탈리아에선 한국어의 인기가 폭발적이다. 올해 250명이 나폴리동양학대 한국학과에 입학했다. 1959년 학과 개설 이래 최대 규모다. 2016년 50∼60명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놀랄 만한 증가세다. 데 베네디티스 교수는 "내가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가졌을 때만 해도 주변의 반대만 심했다. 취직도 어려울 것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 한국어와 한국학의 위상을 정반대가 돼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다"고 자랑했다. 그는 "한국 방문은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8년이 마지막이었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 다시 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나폴리동양학대 한국학과 학생들. 올해만 250명의 신입생이 입학했다. [연합뉴스]

데 베네디티스 교수는 한국학의 성장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고 전망했다. 그는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20~30대 젊은 인구가 많은 도시로 유명하다. 요즘 이탈리아 젊은 층은 한류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 문화와 한국학을 찾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데 베네디티스 교수의 최종 목표는 후학 양성이다. 그는 "한국은 작지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 저력 있는 나라다. 한국인 도전 정신이 강하고 무엇이든 예쁘게 포장하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져서 앞으로도 세계 문화의 유행을 이끌 콘텐트를 만들 것"이라면서 "이런 한국을 연구해 이탈리아에 접목할 차세대 한국학 연구자를 키우겠다"고 말했다.

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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