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대의 은퇴일기⑤] 품격 있는 노년

데스크 2022. 8. 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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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이동할 때는 대부분 전철을 이용한다. 주차 걱정 없고 운동량도 상당하여 일거양득이다. 승객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과 안타까움이 교차하기도 한다.


오랜만에 전철 안에서 흐뭇한 광경을 보았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고, 서 있는 승객들도 여럿 있다. 몇 정거장 지나자 팔순이 넘어 보이는 노신사분이 보좌관처럼 보이는 젊은 사람과 함께 탔다. 연로한 데다 모처럼 전철을 이용해서인지 출발하자 중심을 잘 잡지 못해 자세가 불안하다. 앞에 앉아 있던 60대로 보이는 여자분이 얼른 일어나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자 품격 있게 정장을 차려 입은 어르신은 극구 사양을 하다 마지못해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는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도 눈치받을 나이가 아님에도 선뜻 양보하는 모습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면서 가슴이 따뜻해진다. 인자한 모습에 품위가 있어 보인다. ‘나였으면 선뜻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이런 모습을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젊은 여자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 쪽으로 이동한다. 몇 정거장을 지날 때까지 내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60대 여자분을 위해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좌석을 양보한 두 여자분과 양보받은 어르신의 모습을 본 이후 목적지까지 서서 왔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을뿐더러 잔잔한 미소와 훈훈한 온기가 가슴 가득했다. 언론이나 어른들은 우리 사회에 경로사상이 메말라간다고 이야기하지만,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우리 자식들도 전철을 타고 가다 어르신들을 만나면 자리를 양보할 정도로 인정이 메마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바로 옆 임산부 배려석에는 임산부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앉아 있다. 얼마나 힘들면 그 자리에 앉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원래 의도대로 비워 놓았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대부분은 경로석에 앉기가 눈치가 보이는 5, 60대인 것 같다. 특히 연세 든 여자분들은 자리가 비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앉는 경우가 많다.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태연하게 앉아 있는 아저씨들도 있다. 심지어는 젊은 여자들도 ‘빈 채로 가는 자리인데 피곤하여 좀 앉는데 어때’ 하는 심정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분홍색으로 ‘임산부 배려석’이라고 써 놓은 글씨가 보이지 않는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는 듯 당당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한심하고 측은한 기분마저 든다.


이런 사람들에게 “임산부 배려석이라고 써 놓은 글씨가 보이지 않느냐?”거나 “당신이 임산부냐?”고 한마디 해 주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다. 요즈음 그런 말 했다가 어떤 창피나 봉변을 당한 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이 알고 있음에도 피곤하기도 하고, 별생각 없이 그러는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이 들수록 제대로 처신해야 눈총 받지 않고 대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가 각박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짐에 따라 베이비붐 세대들이 자랄 때와 달리 경로사상은 많이 희박해진 것 같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앉아 있는 사람이 책가방 받아주고 젊은이들이 어른들에게 자리 양보하는 것은 당연시되었는데 이제는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보고 배운 세대는 아직도 어른 우대 사상이 몸에 배어 있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보기도 드물다.


나이 드신 분들도 어른으로서 처신을 제대로 해야 한다. 자리를 양보받거나 어떤 도움을 받았을 경우 고맙다는 말도 없이 덥석 받기만 하거나, 당연하듯이 대하는 것 보면 내가 민망해진다. 오히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가려는 젊은이들을 격려해주고 사기를 북돋아 주어야 할 것이다.


곱고 품위 있게 나이 들어가는 어르신들을 보면 부럽고 그렇게 되고 싶어진다. 인성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사람의 얼굴과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지금부터라도 온화하고 인자한 기품이 조금이라도 베어 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아야겠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 양심과 도덕의 바탕 위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최소한의 규범이라도 제대로 지켜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좋겠다. 그 중심에 내가, 나아가 은퇴하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젊은이들의 본보기가 되어 주면 어떨까?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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