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앞바다서 만난 두 사람의 삶
[김성호 기자]
배낭 하나를 메고서 통영으로 떠났다. 텐트와 침낭, 버너와 코펠부터 노트북과 공책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5년여의 직장생활을 마무리 짓고 떠난 길, 발길 닿는 대로 오가다가 무언가 떠오르면 글이라도 써보려는 셈이었다.
통영에서 가볼 곳이 꼭 한 곳 있었다. 통영 아래 붙은 섬인 미륵도, 그곳에 우뚝 솟은 미륵산이다. 통영 시내와 통하는 북쪽을 제외하고 남은 삼면이 바다와 면한 미륵도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소 중의 명소다.
▲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책 표지 |
ⓒ 문학동네 |
한산해전 전적지 앞에서 만난 식당
미륵산을 내려오자 배가 고팠다. 며칠 째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한 데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내린 탓이리라. 미륵산 아래 주욱 늘어선 식당 가운데 어디를 갈까 고민하며 봉수로를 따라 걸었다. 탁 트인 전망 탓에 봉화가 오르내린 미륵산이기에 길 이름도 여적 봉수로다.
봉수로 끄트머리에 자리한 한 가게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빌레트의 부엌'이라 써진 간판이 통영의 예스러움 사이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럽풍 묻어나는 빌레트란 이름에도 국수와 명란덮밥, 직접 담근 술을 판다니 가벼운 차림의 여행자에게 이만한 선택지도 없을 듯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정한 분위기가 주인장 성격을 그대로 내비친다. 주인장 어머니 이름을 땄다는 김창남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하고 직접 담근 술도 한 잔 곁들인다.
든든하게 먹으며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백패킹 여행자의 커다란 가방을 보고서는 어제는 어디서 잤느냐, 오늘은 어디로 가느냐를 묻는다. 오늘도 마을을 돌아볼 양이면 가방을 맡아주겠다고 한다. 짐 무거운 여행자 시절 가방을 맡아주는 게 그렇게도 좋았다며 제 이야기를 곁들인다. 정말이지 고마운 일이다.
▲ 미륵산 정상에서 본 한산 앞바다 풍경 |
ⓒ 김성호 |
정신병원 이름을 딴 식당이라고?
파울로 코엘료는 지난 1998년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썼다.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라나에 살던 도서관 직원 베로니카가 자살 기도 후 정신병원에서 겪은 일련의 이야기다. 젊고 예쁘고 직업도 있는 데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울 것 없는 여자 베로니카는 소설의 시작과 함께 자살을 시도한다. 뭐가 힘들고 괴로워서가 아니라 더 살아가고픈 동기가 없어서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난다. 깨어난 곳은 류블라나의 정신병원 빌레트, 그곳에서 의료진은 베로니카에게 남은 시간이 며칠이 되지 않는다고 통보한다. 자살기도로 심장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며칠을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거다.
그러니까 빌레트의 부엌은 소설 속 정신병원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그것도 자살을 기도했던 이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난 병원 말이다. 이곳의 무엇이 통영의 식당주인에게 영감을 줬기에 이름을 가져다 붙였을까. 정신병원의 부엌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궁금했다.
▲ 빌레트의 부엌 국수 한 그릇과 술 한 잔 |
ⓒ 김성호 |
한산도 앞바다에서 만난 베로니카의 깨달음
소설은 모두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결말에 이르며 끝을 맺는다. 죽음을 인식하며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서로가 다르기에 비로소 같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란 결국 하고픈 걸 해야만 하고, 그 용감한 선택들이 다른 삶을 가져온 다는 것을 파울로 코엘료 특유의 낭만적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설득하려 한다.
소설을 덮고 생각해보니 한산도 앞바다와 베로니카의 깨달음이 기묘하게 얽히는 듯도 하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던 이순신 장군의 일성이 죽음을 가까이 두어야 삶이 더 분명해진다는 파올로 코엘료의 인식과 맞닿는 것이다. 제가 정말 원하는 걸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 병원을 떠나며 마리아가 병원 울타리 안에 남아 있던 '형제클럽' 사람들에게 남긴 편지처럼 '모험을 찾아 떠나'는 모습 역시 장군의 삶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어명조차 거부하며 바다로 나가 마침내 위대한 승리와 그만큼 위대한 죽음을 얻어낸 장군의 삶 말이다.
소설을 읽고 나니 '빌레트의 부엌'이 무얼 뜻하는지 더 궁금해졌다. 소설 내내 정신병원이 등장하지만 그 안의 부엌은 전혀 조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빌레트는 미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란 거다. 서로가 다르다는 걸 아는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는 그곳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휴게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배를 채우고 가게를 떠나는 손님들을 보며 주인장이 슬며시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리아와 베로니카가 병원을 떠난 뒤 만족하는 웃음을 흘렸을 이고르 원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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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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