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같은우리집] 주거용 아파트 짓는데 세계적 거장이 총동원돼야 하나요?
유명세 및 차별화 디자인으로 수주전 유리한 고지 점하려는 의도
공사비 올라가고 국내 건축학계 성장 저해 요인 될 수도
전문가 "단기간에 명품 만들어 가치 올리고, 조합은 비싸보이는 것만 찾는 것"
최근 대형건설사들이 해외 유명 설계 그룹이나 조명 디자이너를 동원해 조감도를 내놓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각자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소개되는 이들은 이름과 수식어만 들어도 놀랄만한 이력을 자랑한다. 업계는 건설사들의 이런 노력을 수주전에서 찾고 있다. 그럴듯한 설계사를 끌어들여 멋진 조감도를 선보여야 조합원들의 눈과 마음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거주가 목적인 아파트마다 거장들이 모두 참여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읽기도 어려운 '거장'의 이름
설계 그룹 '저디', 설치 예술 명가 '완다 바르셀로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듀오 바스쿠&클루그'…. DL이앤씨가 지난해 8월 북가좌6구역 재건축 사업에 '드레브 372' 단지를 제안하며 내건 이름들이다. 또박또박 읽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이들은 건축 및 인테리어 업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거장이라고 한다.
저디는 미국 라스베가스 5성급 호텔 벨라지오‧두바이 국제금융센터(DIFC) 등 세계적 랜드마크를 설계한 글로벌 설계 그룹이다. 완다 바르셀로나는 설치 예술업계 저명한 스페인의 디자인 스튜디오다. 우리나라에서는 2021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종이꽃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듀오 바스쿠&클루그는 유럽 조명 분야에서 명성이 있다.
DL이앤씨는 당시 홍보 자료를 통해 이 단지에만 7명의 거장과 협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중에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유명한 프랑스 출신 '티보 에렘'도 포함된다. DL이앤씨는 거장을 총동원한 덕에 막판까지 롯데건설을 꺾고 북가좌6구역을 품에 안았다.
다른 건설사도 사정은 비슷하다. 삼성물산은 2020년 신반포15차 재건축 수주전에서 '래미안 원펜타스'를 제안하고 네덜란드 '유엔 스튜디오'와 손을 잡았다. 유엔 스튜디오는 지난 1988년 네덜란드 부부 건축가 '벤 판 베르켈'과 '캘롤라인 보스'가 설립한 설계 사무소다. 독일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 서울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 등을 디자인하며 명성을 높였다.
현대건설은 세계적인 패턴 디자이너 네덜란드 '카럴 마르턴스', 영국 공간예술가 '신타 탄트라', 동화작가 '앤서니 브라운'과 협업을 추진해왔다. 포스코건설 역시 네덜란드의 그로닝거 미술관, 일본 히로시마 파라다이스 타워를 디자인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에게 아파트 디자인을 맡긴 전례가 있다.
표절 시비도
해외 유명 설계사와 협업이 수주전 승리의 열쇳말이 되면서 표절 시비가 불거지기도 한다.
올해 초 HDC현대산업개발(HDC현산개발)과 롯데건설이 맞붙었던 경기 안양시 관양동 현대아파트(관양 현대) 재건축사업 수주전이 대표적이다. 당시 HDC현산개발은 건축 명가 SMDP, 롯데건설은 저디와 협업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일부에서 롯데건설이 조합 측에 제시하는 책자에 공개한 아파트 디자인이 과거 HDC현산개발과 롯데건설이 컨소시엄을 이뤘던 부산 대연8구역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롯데건설이 저디와 협업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추가했고, 저디가 관양 현대를 디자인하기에는 다소 기간이 짧다는 확인되지 않은 추측도 들끓었다.
파장이 컸다. 부산 대연8구역을 디자인한 SMDP 측은 롯데건설 측에 공문을 보내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SMDP 측은 "롯데건설과 롯데건설의 설계사에 설계 무단도용에 대해 법적 조치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롯데건설 측은 "디자인 표절 의혹은 사실무근이다. 디자인을 모방할 이유가 없다"면서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이 단지에 프리미엄 브랜드 '시그니처 캐슬'을 도입하고, 분담금 입주 2년 후 납부 등 파격적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롯데건설의 노력에도 관양 현대는 HDC현산개발에 돌아갔다.
롯데건설 관계자는 디자인이슈와 관련해 "오랜기간 준비한 세계적 디자인 그룹 '저디'社와의 디자인이 치열한 수주전 속에서 왜곡된 방향으로 알려졌다" 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유명한 설계사나 아티스트를 데려오면 조합에 더 많은 표를 받을 수 있고 그럴듯해 보이니까 무리해서 협업을 추진하고, 결국 탈이 난 대표적인 사례"라고 했다.
거장 좋아하다 공사비만 '쑥'
건설사들은 거장과 협업 배경으로 차별화를 거론한다. A 건설사 관계자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은 조경이나 디자인의 수준을 예술로 끌어올리고, (수주에서) 경쟁사와 비교해 확실한 장점을 갖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건설사들의 해외 설계사를 동원한 과도한 디자인 경쟁은 공사비 증가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서울 강북구에서 재건축을 추진 중인 B 조합 관계자는 "문주도 멋있게 짓고, 스카이 브릿지도 연결하는 곳이 늘었다. 멋있긴 하지만 결국 공사비 증가로 (시공사와) 싸움만 난다. 조합 입장에서는 다 대출"이라고 입맛을 다셨다.
학계는 건설사의 이런 트렌드에 분명한 명과 암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이명식 동국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세계적 거장이 한국 아파트 설계에 참여하면 한국을 알릴 수 있고, 세계 건축계에 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또 국내 설계사들에게는 자극도 된다. 건축업계 전반적인 부분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짚었다.
다만 이 교수는 주거가 목적인 공간마다 거장이 참여하는 트렌드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아파트와 같은 주거 공간은 한국적인 생활공간에 맞고, 여러 국내 법규에 맞게 지어야 한다. 겉은 서구 것인데 내부 거주지는 법규적 환경이 따로 있다.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는 실력 있는 설계사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강조했다.
한국초고층도시건축학회 및 한국퍼실리티매니지먼트학회 회장이기도 한 이 교수는 건설사가 해외 유명 설계사를 끌어와 단기간에 명품을 만들어 가치만 높이고, 조합은 비싼 것이라면서 반기는 구조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한국 건축계가 자국에서조차 뒤로 밀려나면 설 곳이 없어지고 발전도 이룰 수 없어서다.
실제로 해외 거장은 국내외에서 떠받들어지지만, 실력 있는 국내 건축가들은 제대로 된 설계비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지적이다. 건설사는 거장만 찾고, 한국 건축계는 침체하고, 아파트 거품만 가득 끼는 악순환의 고리가 완성되는 셈이다.
이 교수는 "최근 K컬처가 명성을 얻고 있다. 국가와 기업의 투자와 제도적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며 "우리 건축업계도 이런 노력과 지원, 정당한 대가만 뒤따른다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저력이 있다"고 힘줘 말했다.
서지영 기자 seojy@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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