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의 고급 취미생활? 나는 택시 안에서 펑펑 울었다 [신필규의 아직도 적응 중]
[신필규 기자]
▲ 퍼즐 |
ⓒ PxHere |
'모든 환자에게는 숨겨진 퍼즐이 있다네. 그런데 잊지 말게. 그 마지막 한 조각은, 자네 손에 있지 않고, 환자 손에 있다는 걸 말이야.'
좋아하는 평론도 영화만큼이나 두고두고 꺼내 읽는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의 <식스 센스>에 대한 글도 그렇다. 간결하고 정확하지만 동시에 영화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지는 글이다. 중학생 시절 이 글을 처음 만났고, 당시에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읽고 또 읽었다. 막연하게 느껴졌던 메시지는 글과 함께 나이를 들어가며 더욱 선명해졌다.
어떤 글을 읽는 일은 때로 시간과 경험이 함께 완성한다는 걸 깨달았다. 인용한 문장은 평론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심리치료 일을 해보겠다는 심영섭 평론가에게 상담을 환자와 의사가 함께하는 퍼즐 맞추기에 비유하며 스승이 한 말이다. 심리치료에 대한 멋진 은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글을 다시 읽을 때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듯 저 문장도 마찬가지였다. 저 말이 매우 온화하고 정직한 독려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막막할 때가 있다. 병원을 찾아 통증과 증상을 이야기 하면 답을 하는 건 의사의 몫이었다. 때로 말조차 필요 없다. 의사들은 환부를 살피거나 사진을 몇 번 찍고는 해야 할 치료를 하고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정신과를 비롯해 임상심리 상담 등 정신 건강을 다루는 쪽은 그게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정신과 의사도 잠이 안 오면 불면을 해소하는 약을, 불안이 심하면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약을 처방해주곤 한다. 하지만 두려움인지 공포인지 아니면 우려인지 애매모호한 감정까지 의사가 그게 무어라 정의 내려줄 수는 없다. 간접적으로라도 답을 주지 않으면 의사는 모른다.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은 내 손에 있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가지고 있던 편견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정신과를 찾고 상담을 받고 약을 먹는다. 처음에는 이렇게 된 내 처지가 원망스럽고 누가 볼까봐 두려워 두리번거리며 병원을 찾았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마음이 지치고 피로하면 병들기 마련이고 그러면 치료를 받으면 된다. 오히려 내 주변에는 정신과를 안 다니는 사람보다 다니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몇 년의 정신과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게 있다. 정신과 진료에 대해 나조차도 선입견이 있었다는 것. 보통 미국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풍경이 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마음고생과 일상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담자의 모습. 그리고 안락하고 고급스러운 사무실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는 의사의 모습(물론 이는 정신과 진료와 임상심리 상담을 완벽하게 혼동한 내 탓이기도 했다).
내게 정신과 진료나 심리 상담이란 건 먹고 사는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중산층이 안정을 구하는 고급스러운 취미 생활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병원을 찾을 때는 아파서 가는 것이고 때로는 이미 통증이 있는 환부를 건드려야 한다. 치과나 외과 진료를 상상해보라. 사람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병원을 찾기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정신과 진료도 마찬가지. '요즘의 마음은 어떠신가요'라는 평범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진료는 평온하게 끝나는 일이 드물다. 마음의 뒤편으로 묻어두었던 분노, 억울함, 우울, 두려움 등이 저마다의 청구서를 들고 뛰쳐나온다. 때로 진료의 과정은 이걸 끝까지 부인하고 싶은 나와 감정들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의 연속이다. 그러면 의사는 중재에 나선다.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질문을 하면서.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 결과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 자료사진 |
ⓒ PxHere |
병원을 찾자마자 즉각 호전이 되는 상처는 거의 없다. 진료를 받고 상처를 치료하거나 주사를 맞은 뒤 끙끙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 순간 증상이 점점 옅어지다 사라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진료실의 문을 닫고 나올 때는 망신창이 폐허의 상태다. 진료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이미 그랬는데 그걸 확인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질리고 지친다(나는 정신과 진료는 받아봤지만 심리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적은 없는데 그쪽은 어떨지 궁금하다). 가끔 내가 주로 처방을 받는 병원 주변의 약국을 지나가다 공허하고 피로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생각하곤 한다.
'정신과 진료 받고 왔구나... 힘들었겠다...'
중산층의 안정을 위한 고급스러운 취미 생활이라니. 이건 정신과 진료와 심리 상담에 대한 아주 건방진 선입견이었다. 겪는 사람에게는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는데.
이 글을 쓰는 건 갑자기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게 어떤 것인지 설명하고 싶어서 때문은 아니다. 사실은 근 며칠간 감정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밤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다가 내가 친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택시기사님은 내가 정말 싫었겠다. 밤에 일하는 게 즐거울 리 없는데 나같이 심란한 손님을 태우고 말았으니. 두 번째는 '내가 정말 그렇게 힘들었나?'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난 다음 울면서 했던 이야기를 돌이켜보니 그게 정말 그럴 일이었는지, 내가 감정에 상처를 받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술을 마시고 과민해진 탓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비웃듯 이후로 며칠간은 침대에 누워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다.
감정의 파고를 잘 견뎌내자
사람들은 우울을 겪는 이들에게 위험한 순간들을 몇 가지 꼽고는 한다. 대표적인 게 환절기, 특히 가을이나 겨울로 넘어가는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저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그런 시기가 오기 전에는 나름의 대비를 하는 편이다. 또 한 가지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게 있다면 일상의 한 국면이 지나가는 시기도 그렇다. 가령 인생에 너무도 중요한 일을 해내느라 긴장감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느슨해지는 때, 일이 너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순간이 막 지나가는 때. 그렇게 밖으로만 여기저기 팔려있던 신경이 다시 안을 향할 수 있을 때 마음 속 숨죽이고 있던 감정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순서가 왔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지금 우울한지 감정적으로 지쳤는지 명백히 파악할 수 있다면 탈진할 정도의 감정의 파고는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진료 일정을 당기거나 하다못해 사람을 붙들고 하소연이라도 하며 묵은 걸 털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서두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은 나에게 있는데 나조차도 그게 뭔지 모른다. 조각이 있는데 이걸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 아니면 정말 조각이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신경 쓰지 않으면 괜찮을 일인데 괜히 곱씹다가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건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확증 편향과 과도한 몰입은 마음 건강에 해로운 일이다. 어떤 감정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면 흘러가고 만다. 그런데 반대로 이게 편향도 과도한 것도 아니고 내가 내 감정과 경험에 대해 옳게 판단한 게 맞는다면? 무시하는 게 아니라 신경을 더 써야하는 것이라면? 하지만 우왕좌왕이 반복될 뿐 진상을 스스로 알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내 상태를 잘 모른다. 아니면 인정을 못한다. 그게 쉬웠다면 애초에 의사와 상담사가 있을 이유가 없다.
내 마음이 힘들 때는 주변이 보이지 않지만 괜찮아지고 나면 나와 같은 구렁텅이에서 괴로워하는 지인들을 발견한다. 이들은 주로 SNS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알리는데 안타까움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그 상황을 모면할 해답을 주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고 대신 조언을 하고 싶다. 사람이 기력이 떨어질 때 보양을 하는 것처럼 마음에도 같은 일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방법은 가능한 햇볕을 많이 쬐고 제철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나는 것이다. 감각을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열어두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울이든 분노든 감정 때문에 심신이 괴로울 때 비교적 잘 버틸 기초체력이 된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다. 친구들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보다 수월하게 견딜 수 있게 대비하자. 그리고 약 잘 챙겨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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