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총검 든 의사

이용상 2022. 8. 1.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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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상 산업부 차장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대표 칼럼니스트 8명을 내세워 각자 과거에 쓴 칼럼의 오류를 인정하는 반성문을 냈습니다. 그러면서 “극단화된 정치 환경과 자기 확증 편향에 빠진 소셜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언론부터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지적인 소통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죠. 이 기사를 보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습니다. 뭐랄까, 쉽게 써선 안 될 기사를 쉽게 썼다는 일종의 죄책감 같은 걸 느꼈습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들은 수년 전 칼럼을 바로잡겠다고 들고 왔지만 제가 반성할 기사는 불과 일주일 전에 쓴 기사입니다. 이 글은 그때 기사에서 다루지 못했던 내용에 관한 겁니다.

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증상을 묻습니다. “갈비뼈 아래쪽에 통증이 느껴져서요.” 의사가 다시 묻습니다. “충격을 받은 적이 있나요?” “아뇨, 없는 것 같아요.” “아, 혹시 취해서 기억을 못하는 건 아니고요?” “아, 네. 술 마시고 기억을 잃은 적은 있어서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일단 엑스레이(X-ray)부터 찍어볼게요.”

의사는 아픈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장 먼저 어디가, 왜 잘못됐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병원에서 이것저것 증상을 묻고 그것도 모자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엑스레이,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을 촬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이렇게 해도 몸을 가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며 조심스러워합니다. 진단을 잘못하면 처방은 엉뚱해질 수밖에 없겠죠.

대우조선해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청업체 노조는 옥포조선소 1독(dock)에서 건조 중인 원유 운반선 바닥의 철제구조물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습니다. 사측은 파업으로 인한 피해가 8000억원을 넘는다고 진단했습니다. 윤석열정부는 “산업 현장의 불법 상황은 종식돼야 한다”고 했고, 공권력을 투입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불법 파업은 잘못된 것이죠. 다만 무엇이 그런 상황까지 몰고 갔는지, 원인을 정확히 진단한 뒤 대응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쟁의권을 얻고 적법하게 시작한 파업이었습니다. 사측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50대 여성이 전치 12주의 상해를 입었습니다. 원청 단톡방에서 ‘산탄총 한 자루 들고 하청 노동자 하나씩 박멸해 나가자’는 내용이 공개됐습니다.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1㎥(0.3평) 감옥에 31일간 자신을 가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파업이 끝난 뒤 한 언론은 하청노동자의 급여지급 명세서를 공개했습니다. 30m 높이 선박에 매달려 위험하고 고된 노동을 한 대가는 한 달 근무 시간 228시간에 실수령액 207만5910원. 동료들이 떠나면서 남은 이들의 노동 강도는 더욱 세졌습니다.

윤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특공대 투입까지 검토했습니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사측 불법행위가 나온 것을 추려보기만 해도 6가지가 넘는다. 그런데 왜 사측 불법행위는 어떻게 한마디도 없느냐. 만약 처음부터 노사 똑같이 불법행위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얘기했으면 과연 파업이 이렇게 끝났겠느냐”고 날을 세웠습니다. 특공대 투입을 검토했다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한마디 합니다. “그 과정은 제 담당이 아니라 고용노동부 담당입니다. 정상 참작은 되겠습니다.”

결국 교섭은 타결됐고, 정부는 “법과 원칙으로 해결한 선례”라고 자화자찬했습니다. 진단 없이 내린 처방에도 이렇게 뿌듯해하는 걸 보며 앞으로의 처방도 이런 식이면 어쩌나 했는데 결국 경찰국 신설에 반대하는 전국 경찰서장회의를 두고 “하나회의 12·12 쿠데타에 준하는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정부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수술용 메스가 아닌 ‘군대의 총검’과 무엇이 다른가요.

이용상 산업부 차장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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