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대통령에겐 표현의 자유가 없다

2022. 8. 1.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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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숙 전 국회의원


“수사는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하되 마녀사냥식이어선 안 된다.” 1999년 6월 러시아 몽골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김대중(DJ) 대통령은 한 달째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른바 ‘옷 로비 의혹 사건’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미국 일본 중국에 이어 4강 외교를 마무리 지은 러시아 순방 보도는 뒷전이고 의혹 사건으로 연일 지면을 채운 언론에 대한 불만 섞인 이야기였다.

귀국 직전 몽골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는 옷 로비 의혹 사건과 관련, ‘사직동팀을 해체할 것인가’라고 묻는 말이 이어졌다. “국내 문제는 귀국해서 이야기하겠다”고 거듭 답하던 DJ는 세 번째 질문 끝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합시다”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했다. 관련 질문이 쏟아질 것이니 기자간담회도 귀국 보고도 생략하자는 건의에도 불구하고, 4강 외교의 완성에 관해 직접 설명하고자 가진 자리였다. 귀국한 뒤 사직동팀 해체를 발표할 계획이 있었지만, 굳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 역시 외교 성과가 묻히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남공항의 귀국 보고에서 ‘마녀사냥’이란 말이 불쑥 나온 것이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참고 참다가 터져 나온 ‘본심’이었다. 그러나 밖으로 내놓아서는 안 될 말이었다.

DJ는 지방의 신문사를 운영했고, 1960년대부터 민주주의, 노동문제 등을 기고했던 문필가이기도 했다. 기자들 사이에는 ‘DJ의 말은 그대로 받아쓰면 문장이 된다’ ‘연설은 거의 논문 수준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논리 정연했다. 1964년에는 의정 사상 최초로 필리버스터를 시도해 5시간19분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달변으로 알려진 그가 자신의 말과 글에 얼마나 엄격했는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연설문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그는 조탁과 퇴고를 거듭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중요한 연설은 직접 녹음한 뒤 녹취를 풀어 참모들의 의견을 듣고 다시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기자회견이나 국민과의 대화, 정상회담 같은 주요 일정을 앞두고는 수백 쪽의 예상 질문 답변을 검토한 뒤 다시 토론을 통해 의견을 다듬었다. 더 나은 더 정확한 표현을 찾기 위한 노력은 밤낮없이 계속됐고, 이어지는 대통령의 추가 질문에 참모들도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고 엄격한 그에게서 툭 튀어나온 마녀사냥이란 말은 주워 담기 어려운 실수였지만, 한편으론 예견됐던 일이었다. 당시 DJ는 법무부 장관과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대한 공격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필자를 포함한 여러 참모가 장관과 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해 수사받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했을 때 그는 ‘잘못이 없는데도 언론과 여론의 공격 때문에 장관이나 참모를 내친다면 누가 나를 믿고 일하겠느냐’며 완강히 거부했다. 재삼재사 건의가 이어지자 사표 수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녀사냥 발언은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결국 대통령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옷 로비 의혹 사건 국회 청문회에서 밝혀진 건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고, 이어진 특검 수사도 ‘실패한 로비’로 종결됐다. 논리적으로는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란 말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은 로비가 성공했는지 여부가 아니었다. 외환위기 상황에서 장관 부인들이 값비싼 옷을 사러 몰려다녔고, 부실기업 수사를 막기 위한 로비 시도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국민 여론은 들끓었다. 대통령이 챙겨야 할 것은 참모나 장관을 위한 정의가 아니라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이었다.

대통령에겐 억울해 할 자유도 그것을 표현할 자유도 없다. 그런 자유를 누리기엔 그 책임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향 곡선을 그리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문제는 대통령에게 있고 책임도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다. 거친 말들이 여과 없이 터져 나올 때 국민은 실망하고 불안해진다. 몇 년째 계속된 팬데믹에 다가오는 경제 위기까지 겹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국민을 생각해 보라. “처음 해봐서…”라는 말에 기가 막히고, ‘내부 총질’ 운운하는 문자에 어이가 없어진다. 대통령의 실수를 너그럽게 봐줄 여유가 지금 우리 국민에겐 없다. 국민을 위로하고 설득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라. 대통령에게 허용된 아주 작은 자유는 답변을 잠시 미루거나 때론 침묵으로 대신하는 것뿐이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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