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유의 퍼스펙티브] 우크라 전쟁, 미국 주도의 석유질서에 힘 실어주나

2022. 8. 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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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유시장의 ‘보이는 손’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유가의 기준인 브렌트유가 배럴당 130달러를 돌파하기도 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무역 적자는 103억 달러로, 외환위기가 왔던 1997년 92억 달러보다 많은 역대 최대 규모다. 석유·가스 등 에너지원 수입액은 879억 달러로 전년 대비 두 배에 달했다. 지구 반대쪽에서 일어난 영토 분쟁이 국제 유가를 통해 한국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번 전쟁이 유럽을 향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병참이 승패를 결정하는 현대전의 원리상 국내총생산(GDP) 1조5000억 달러(2020년, 세계은행)에 불과한 러시아가 GDP 21조 달러인 유럽연합(EU)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 미국은 대러시아 석유 수출 제재와 우방 동참 끌어낼 명분 확보
장기적으론 사우디 불만 줄이고 이란 핵 협상에도 유리할 수도
중동 산유국이 유가 안정시키는 ‘페트로 달러 체제’ 부활 조짐
약육강식의 국제사회, 한국의 능동적인 대처 갈수록 중요해져

세계평화 위협하는 석유 분쟁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구소련 붕괴가 남긴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해묵은 영토 분쟁이 일단락되면 세상은 점차 평온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 유가 만큼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냉전 이후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국제 분쟁의 중심에는 석유가 있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균형이론을 설파했다. 그는 『국부론』에서 “자유시장은 세상이 원하는 상품을, 세상이 원하는 양만큼, 세상이 원하는 가격에 생산하도록 한다”라고 했다. 시장가격이 균형 가격보다 높으면 공급 초과로 가격이 낮아지고, 균형 가격보다 낮으면 수요 초과로 가격이 높아져 결국 균형에 도달하게 되는 메커니즘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다. 하지만 유가는 예외다. 1970년대 두 차례 석유위기(Oil Shock)로 4배나 폭등해 세계 경제를 침체로 몰아갔고, 2008년 7월에도 배럴당 145.49달러까지 치솟아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 균형을 찾지 못하는 경우를 시장 실패라고 한다. 석유시장이 실패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석유는 필수재이기 때문에 단기 수요 탄력성보다 장기 공급 탄력성이 높다. 기후·전쟁·사고 등 시장 외적 요인으로 인해 유가가 상승 또는 하락할 때 수요는 단기적으로 큰 변동이 없고 공급은 장기적으로 크게 반응해 유가 등락 폭이 점점 더 커진다. 수요·공급이 균형에 접근할 때 시차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거미집 같다고 해 경제학에선 이를 ‘거미집 이론(cobweb theorem)’이라고 부른다.

둘째,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대부분은 국가 재정 수입을 석유 수출에 의존한다. 외부적 충격으로 석유 가격이 오르면 석유 수출 대금이 늘어나 생산을 줄일 수 있고, 생산을 줄이면 유가는 더욱 올라 유가가 폭등한다. 유가가 하락하면 생산을 늘려야 해서 유가가 더욱 폭락한다.

유가가 폭등하면 세계 각국의 경제성장률이 하락하고 실업이 증가한다. 유가가 폭락하면 산유국 경제가 위협받는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국제 석유시장에서 전후 70여년간 몇 차례 석유 위기는 있었지만, 국제 유가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동, 미국에 의존하며 안보 유지

그것은 미국이 국제 석유시장의 안정을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석유 부국들이 미국의 요청에 따라 유가가 오르면 생산을 늘려 유가를 낮추고, 유가가 내리면 생산을 줄여 유가를 높이는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 역할을 해왔다. 이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균형을 찾지 못하는 석유시장에서 균형을 찾아주는 ‘보이는 손’ 역할을 했다.

중동 석유 부국들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이 그들 국가의 안보를 책임져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란·이라크·터키·이집트 등 지역 패권을 노리는 국가들 사이에서 부족 국가로 시작한 중동 석유 부국들에는 국가 안보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미국 주도의 세계 석유 경제 질서는 세계화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석유 수송을 위한 미국의 제해권 확보로 바닷길이 안전해지자 석유 등 원자재의 대량 공급이 대량 생산을, 또 상품의 대량 수출이 대량 소비를 가능하게 했다. 풍요와 번영의 현대 산업사회가 본격적으로 성숙하게 된 것이다.

미국 주도의 세계 석유 경제 질서에 대한 심각한 도전도 있었다. 첫 도전이 1, 2차 석유위기였다. 고유가로 종말을 고할 듯 보였던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는 1974년 모든 국제 원유 거래는 오직 달러로만 하는 미국·사우디아라비아 간 ‘페트로 달러(petrodollar) 체제’에 의해 부활한다. 미국의 누적된 대외무역수지 적자는 동아시아와 유럽 흑자국으로부터 중동 산유국으로 유입되고, 오일 달러는 다시 투자와 첨단무기 구매 등을 통해 미국으로 환류되었다. 석유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것은 미국 대외 전략의 놀라운 승리였다.

9·11 테러와 셰일혁명의 충격

두 번째 도전은 9·11 테러였다. 비록 테러는 일회성으로 끝났지만, 이것은 미국의 중동 석유 장악력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다. 미국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벌였다.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라덴과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명분이 없어진 후에도 미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미군을 중동에 주둔시켜 석유 장악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세 번째 도전은 셰일혁명이었다. 셰일혁명으로 미국은 더 이상 중동 석유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다. 이것은 대외무역수지 적자에 허덕이던 미국 경제에 축복이었다.

그러나 셰일혁명은 페트로 달러 체제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는 심각한 위기이기도 하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수출 시장에서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감산에 반대한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증산 경쟁에 돌입해 국제 유가가 배럴당 20달러대로 폭락하기도 했다. 게다가 미군의 이라크 철수로 안보에 위협을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을 끌어들이는 ‘페트로 위안(Petro-Yuan)’으로 미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급등한 유가를 잡기 위한 미국의 요청에 냉담한 반응을 보여온 사우디아라비아는 지난 15일 방문한 바이든 대통령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미국 주도의 세계 석유 경제 질서는 이제 종말을 고하고 있는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러시아 석유 수출 제재와 우방의 동참을 끌어낼 명분을 확보했다. 전후 원자재 가격 쇼크가 진정되고 나면 장기적으로 미국은 러시아 석유 수출 제재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앙숙 관계에 있는 이란과의 핵 협상도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 중동 석유 부국을 스윙 프로듀서로 하는 미국의 페트로 달러 체제는 다시 한번 안정을 되찾게 될 것이다.

러시아 제재에 불참한 국가들

각국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서로 복잡하게 얽힌 미래 국제 정세를 예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중동전쟁과 석유위기,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준 일관된 미국의 대외전략으로 미루어볼 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위기 또한 미국의 세계 석유 경제 질서 유지를 위한 기회로 활용될 개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의 참상은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이번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맹방 이스라엘, 나토 회원국 터키, 쿼드(Quad) 가입국 인도 등 무려 47개국이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보스포럼에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평화협정 발언을 필두로 협상론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당장 러시아의 석유와 자원이, 북극항로가 열어갈 신세계가 어떤 나라에는 위기로, 또 어떤 나라에는 기회로 다가올 것이다. 1980년대 저유가·저달러·저금리 3저 현상이 한국의 산업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면 이번 전쟁 이후를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선진국 도약의 기회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한국의 선택에 달렸다.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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