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살인" 심리학자 동원..드라마 뺨친 이은해 재판

심석용 2022. 7. 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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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은해(왼쪽)씨와 조현수씨가 지난 4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사법의 변방 인천에선 최근 형사재판사(史)에 기록될만한 희소성 있는 법정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인천지법 형사15부(이규훈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되고 있는 ‘계곡 살인 사건’(피고인 이은해)이다. 사건 자체도 경악스런 요소들이 많았지만 희소성을 극대화한 건 이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하면서 ‘심리적 지배(가스라이팅)에 의한 살인’이라는 이론을 세운 검찰의 기소였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를 조작해 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 피해자들은 자존감·판단력 저하, 우울·불안, 가해자에 대한 높은 의존 등의 증세를 보인다. 검찰은 2019년 6월 30일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윤모(사망 당시 39세)씨가 구조장비 없이 4m 높이의 바위에서 3m 깊이의 계곡물에 뛰어들어 사망한 것이 이씨 등이 행한 가스라이팅의 직접적 결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작위에 의한 살인이 인정돼야 한다는 게 검찰의 논리다. 반면 이씨 측은 “가스라이팅은 전혀 없었다”는 입장이다.


가해자 의존 유도하는 심리적 지배


국내엔 가스라이팅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다. 다만 학계에선 가스라이팅의 전개과정을 일반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특정인을 대상으로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구축하는 시도 ▶정신적 지배력을 강화, 반복적인 정서적 학대 ▶비정상적 심리통제에 의한 2차 가해 등이다. ▶피해 기간이 길고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를 인식하지 못해 치료와 보호가 어렵다는 점과 ▶피해자가 주위로부터 고립돼 자존감이 현저히 떨어지고 가해자에게 순종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점 등도 가스라이팅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2010년 가해자 양모씨는 권모씨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기계교’라는 종교에 등록하라고 한 뒤 ‘속옷을 입지 말아라’,‘잠을 자지 말아라’ 등의 지령을 전달했다. 그는 이를 어긴 것의 벌금 조로 2년간 1억7000만원을 뜯어가고 권씨에게 두 딸에 대한 학대를 지시한 끝에 살해케 만든 혐의로 2012년 기소됐다. ‘기계교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국내에 알려진 가스라이팅 범죄의 전형적 사례로 거론된다. 결국 징역 12년 형을 받은 양씨에게 인정됐던 혐의는 살인이 아닌 살인방조와 아동학대였다.

‘계곡 살인 사건’의 공소내용에 따르면, 이씨는 수년간 피해자 윤씨가 가족과 교류하지 못하게 막았고 윤씨는 기초생활조차 제대로 영위할 수 없는데도 이씨의 송금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지인과 대부업체로부터 돈을 빌렸다. 또 윤씨는 이씨의 강압적인 언행과 욕설에도 원망하지 않고 자책하며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심리적·물질적으로 우위에 서게 된 이씨의 각종 요구에 따르면서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고 한다. 윤씨는 이씨의 내연남에게 “은해로부터 꼭 인정받고 싶다. 은해로부터 ‘쓰레기 새끼, 정신병자’란 소리 안 듣고 존중받고 싶다. 은해가 짜증 내고 욕할까 봐 무섭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씨는 생전 생계곤란에 시달리면서도 이은해씨의 지속된 송금요구에 응했다고 한다. 사진 윤씨 유족 제공

이씨가 윤씨로 하여금 자존감과 합리적 판단 능력을 상실케 해 자신의 요구를 쉽게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도록 심리적으로 제압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 측은 “수영을 전혀 못 해 다이빙을 망설이던 피해자에게 자신들을 믿고 아무런 구호 장비 없이 물속으로 뛰어내리도록 하는데 이씨의 심리적 지배가 작동했다”고 주장한다.

가스라이팅은 그간 수사기관(경기일산서부서, 인천지검)이 이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하는 데 핵심적인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하지만 심리적 지배에 의한 살인을 인정한 국내 판례가 없는만큼 유죄 인정 여부에 대한 법조계의 전망은 엇갈린다. 지난 21일 이 사건 3차 공판에선 재판장이 “가스라이팅이 전문적인 학술적 용어가 맞냐”라고 묻기도 했다. 최근 검찰은 가스라이팅 기제 대한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와 이지연 인천대 창의인재개발학과 교수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해외 법원은 유사 사례에 가해자 책임 인정


인천지방법원 전경. 심석용 기자
영미권에선 정서적 학대 등 심리적 지배와 피해자의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판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지난 2019년 보스턴 칼리지 재학 중 남자친구가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 혐의로 기소된 한인 여성 유모(24)씨에 대해 미국 법원이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집행유예 2년 6개월과 보호관찰 10년을 선고한 게 대표적이다.

외신 등에 따르면 유씨는 18개월 동안 남자친구 A씨와 사귀며 7만5000건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유씨는 문자 메시지로 A씨에게 “죽어라”, “네가 죽으면 세상이 더 나아질 것” 등의 메시지를 보내며 언어·정신적 학대를 이어갔다고 한다. A씨는 2019년 5월 20일 졸업식 날 주차장에서 투신했다. 검찰은 유씨가 A씨의 극단적 선택을 유도했고 극단적 선택을 예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 과실치사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기소했다. 기소 취하 청구를 하는 등 혐의를 부인하던 유씨는 선고를 앞두고 고살(故殺, manslaughter) 혐의를 인정하고 검찰과 양형을 합의해 감형받았다.

이수정 교수는 “미 법원이 반복적인 심리적 학대, 즉 가스라이팅으로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해 가해자의 형사책임을 인정한 대표적 판례다”라면서 “영미권 국가에선 강압적 통제와 같이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행위도 처벌 대상으로 보고 있다. 사건에 적용한 사례도 다수 존재한다. 유씨 사건을 계기로 이런 판결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볼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익명을 원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는 “성인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타인의 요구만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다는 것을 법원이 쉽게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재판 내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거 같다”고 전망했다.

반면 김한규 변호사(법무법인 공간)는 “정상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수영을 못하는데 절벽에서 계곡으로 뛰어내리지 않는다. 이씨가 윤씨를 뛰어내리도록 유도한 정황이 포착된 가운데 평상시 이씨가 윤씨를 심리적 지배했다는 부분이 입증된다면 작위에 의한 살인이 인정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계곡살인 검거.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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