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인 줄 알았는데 서스펜스.. "'하네되'는 어른 위한 동화"
요즘 웹툰 시장의 대세를 묻는다면 단연 로맨스 판타지(로판)다. 화려한 궁중물, 바디 스와프(몸이 뒤바뀌는 소재), 타임 슬립(시간 이동), 죽음에서 삶으로 회귀 등 다양한 판타지에 로맨스를 얹는다. 네이버웹툰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하네되)도 언뜻 보면 바디 스와프를 토대로 한 로판물처럼 보인다. 거대한 제국, 멋진 황태자가 등장하니 궁중 로맨스로 흘러갈 만한데 이 작품은 모든 예상을 빗나간다. 여주인공들이 황태자와 사랑을 가꿔나가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각종 욕망이 뒤엉킨 궁중 암투물이다. 핑크빛 로맨스보다는 핏빛 서스펜스에 가깝다.
보통 로판물에선 여주인공 두 명이 사랑싸움을 벌인다. ‘하네되’엔 이런 클리셰도 없다. 귀족의 딸을 넘어서 더 큰 야망을 갖고 메데이아, 주체성 없이 남에게 휘둘리는 삶을 사는 프시케는 서로 힘을 합쳐 성장해나간다. 극 초반엔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 두 사람이 대립각을 세우지만 우연히 몸이 뒤바뀌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들의 진짜 적은 황태자 이아로스다. 황태자가 악당으로 등장해 매우 신선한 이야기가 됐다. 기존 로판의 공식을 깬 ‘하네되’는 인기에 힘입어 오디오웹툰, 제페토 상품 등 다양하게 활용됐다. 단행본도 인기리에 판매됐다.
지난 26일 서면 인터뷰를 통해 ‘하네되’를 연재 중인 웹툰작가 ‘삼’을 만났다. ‘하네되’ 기획 배경을 묻자 삼 작가는 “‘매드 앳 디즈니(Mad at Disney)’라는 팝송이 있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디즈니를 보고 믿었는데 현실 속 사랑은 달랐어. 디즈니가 날 속였어!”라는 가사가 포함된 노래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디즈니 만화영화와 함께 자랐지만 살아보니 현실은 그와 달랐다. 치고 박고 싸우며 지친 어른들에게 새로운 동화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면서 “사랑이 환희로 가득하지만은 않다는 걸 아는 어른들에게 커튼으로 감춰뒀던 무대 뒤 진실을 드러내는 듯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연재를 시작할 때 이미 웹툰 시장에는 로맨스 판타지 열풍이 일고 있었다. 삼 작가는 변주를 줘 스토리를 기획했다. 처음엔 몸이 바뀌는 두 여자의 이야기라는 큰 틀만 잡았다. 메데이아와 프시케의 몸이 바뀌는 사건은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설정이다.
수많은 독자가 입을 모아 말하는 ‘하네되’의 매력은 성장형 캐릭터를 지켜보는 것이다. 이 작품 속에는 제자리에 머무는 인물이 없다.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인물들은 입체적이다. 메데이아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인물이다. 하지만 따뜻한 햇살 같은 프시케의 영향을 받아 점차 그의 내면에 있던 선함이 드러난다. 연약하고 보호받는 게 익숙했던 프시케는 메데이아의 강인함을 본받아 주체적인 인물로 변모한다.
‘하네되’는 여성 팬덤이 두텁다. 메데이아와 프시케는 사랑에 목을 매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백마 탄 왕자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그런 동화 같은 설정이 아니다. 인생의 잔혹한 역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면서 이들은 하나의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한다. 특히 검술, 지략 등 다방면에서 모두 뛰어나면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메데이아는 수많은 ‘여덕’을 생성했다.
메데이아와 프시케의 성장 스토리로 삼 작가가 건네려는 메시지는 희망이다. 삼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의지가 꺾이는 순간이 오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마음이 희망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미 좌절했더라도 다시 일어서보자는 결심 역시 희망이고, 프시케와 메데이아는 그런 희망과 용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프시케는 결혼을 약속했던 황태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단 사실을 알고 좌절한다. 메데이아는 가족으로 인한 상처가 깊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 보니 오해에 오해가 쌓여 희대의 악녀로 대중에게 미움도 받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역경을 극복해나간다.
삼 작가는 “우리 세대는 능력에 비해 위축돼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더 크게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인재들이 자신을 믿고 나아갈 힘을 가지기 힘든 세상이다”라며 “그러다 (내 작품을 보며) 가끔 ‘이 만화 캐릭터 멋있는데’ ‘이 캐릭터처럼 용기를 내 볼까?’하는 마음을 잠깐이라도 가져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하네되’는 스토리도 강렬하지만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그림체가 보는 재미를 더한다. 드레스나 장신구부터 웅장한 왕궁과 공작 저택까지 그림의 디테일이 대단하다. 삼 작가는 어시스턴트들과 함께 모든 컷에 정성을 쏟는다고 했다.
2020년 1월부터 2년 넘게 연재를 이어오던 ‘하네되’는 지난 5월 30일부터 3개월간 휴재에 들어간 상태다. 오랜 시간 쉼 없이 달려왔으니 잠시 쉬면서 재정비와 휴식을 갖자는 취지다. 연재는 다음 달 다시 시작한다. 삼 작가는 ‘하네되’를 연재하면서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처음 작가가 됐을 땐 ‘이제 바빠서 사람들을 못 만나겠구나’ 했는데 반대로 해일처럼 넓은 사람들을 만나는 길이기도 했다. 모니터 너머에 수많은 독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전해주는 수많은 말을 들으며 혼자서 소통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는 ‘하네되’가 언젠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면 좋겠다고 바람을 내비쳤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움직이면서 말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매력적”이라면서.
삼 작가에게 ‘하네되’는 데뷔작이다. 그의 필명은 탄생목인 삼나무에서 따왔다. 삼나무의 꽃말은 ‘그대를 위해 살다’라고 한다. 그는 타인, 특히 약자에 대한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웹툰 작가로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의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쉬운 방법은 세대와 성별, 나이를 이유로 한 차별과 약자 멸시”라면서 “작가라면 언제나 만화의 독자에게 그릇된 메시지를 전하진 않을까 경계해야 한다. 인기가 많은 작가일수록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삼 작가는 고등학교 때 만화를 전공했으나 성인이 된 후 독학을 했다. 나중에야 학원에 다니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늦게 받은 게 오히려 득이 됐다. 독학할 땐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다”며 “뭐 하나 궁금하면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쌓아 놓고 읽었다. 그때의 경험이 쌓여 작가로서의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앞으로 어떤 작품을 그리고 싶은지 물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 우리는 모두 수천 가지 장점 중 하나를 못 찾았을 뿐 멋지고 찬란한 사람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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