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위헌'이 뭐기에.. 30년 고래싸움
헌재는 '판결 취소' 대법은 '불수용'.. 끝없는 권한 다툼
A씨는 법원에서 세 번의 재판을 받고 유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공무원으로서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받은 혐의를 인정해 A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3심제를 택하고 있는 한국에서 A씨가 대법원 판결에 불복해 또 재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통상적으로는 없다.
그가 찾아낸 방법은 헌법소원이다. 본인이 지냈던 제주도 통합영향평가심의위원회 민간위원 신분을 공무원 직위에 포함시키는 해석은 위헌적이라는 주장이었다. 헌법재판소도 A씨의 청구를 받아들여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 A씨는 이 결정을 근거로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그리고 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헌재는 다시 이 대법원 판결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과 헌재가 한정위헌을 놓고 대립하는 상황에서 뫼비우스의 띠 같은 ‘n심 재판’의 불씨는 계속 살아날 수 있다. 헌재는 법 해석과 관련해 위헌 판단을 내리는 한정위헌 역시 위헌 결정 중 하나라는 입장이지만, 대법원은 이를 부인한다. 이 문제로 두 기관이 다퉈온 세월이 30년을 넘어섰다. 오랜 기간 갈등을 빚어왔음에도 뚜렷한 해결책은 찾지 못한 상태다.
두 기관의 첫 충돌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법원은 민법 764조에 근거해 명예훼손을 한 자에게 사죄광고를 명령할 수 있었다. 해당 조항에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게 법원이 손해배상과 함께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언론사가 1989년 7월 이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다. 이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에 실린 특정 인물이 명예훼손을 주장하며 손해배상과 사죄광고를 요구한 게 발단이었다. 언론사는 “사죄광고를 명할 수 있도록 한 법 조항은 양심의 자유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헌재는 1991년 4월 “민법 764조상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에 사죄광고를 포함시키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한정위헌 결정을 내놨다. 당시엔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큰 파장은 없었다.
갈등이 선명해진 건 1997년 한정위헌 관련 첫 재판 취소 결정이 나오면서부터였다. 1995년 이길범 전 의원은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양도소득세를 물리는 건 부당하다며 과세 처분 취소 소송을 냈다. 대법원이 이 전 의원 사건을 심리하는 동안 헌재는 다른 사건에서 실거래가 기준으로 양도소득세를 부과한 것에 대해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와 무관하게 이 전 의원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그러면서 “한정위헌은 헌재의 견해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며 법원이 가진 법령 해석·적용 권한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 전 의원은 다시 헌법소원을 냈고, 헌재는 1997년 12월 이 전 의원 패소 판결을 취소했다. 헌재는 “한정위헌 결정은 법률 해석에 대한 헌재의 견해가 아니라 위헌 결정의 한 유형”이라고 반박했다. 이 사건은 국세청이 헌재 입장을 수용하면서 일단락됐다.
최고사법기관 사이의 충돌은 25년 만에 나온 재판 취소 결정으로 다시 주목받게 됐다. 헌재는 지난달 30일 A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취소하며 “한정위헌의 기속력을 부인한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헌재가 다시 최종적으로 심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6일 뒤 대법원은 입장문을 내 헌재의 판단을 반박했다. 법원 판단을 헌재가 통제한다면 대법원을 최종심으로 하는 심급제도가 사실상 무력화된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3주 뒤 또다시 대법원 판결을 취소하는 헌재 결정이 나왔다. 옛 조세감면규제법 부칙 적용으로 세금을 낸 기업들이 낸 헌법소원이었다. 앞서 헌재는 2012년 개정 전 부칙을 유효하다고 해석하는 건 위헌이라고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지만, 대법원은 이를 근거로 낸 기업들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었다. 대법원은 헌재의 3차 판결 취소와 관련해 “기존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판결 취소라는 정면충돌 외에 크고 작은 장외전도 끊이지 않았다.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을 놓고 헌재는 민간인이 사고에 개입됐다면 군인 사망사고도 국가배상이 인정돼야 한다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지만, 2001년 대법원은 관련 소송에서 이 결정을 배제했다. 2009년에도 대법원은 상속세법 조항과 관련된 한정위헌 결정을 적용하지 않고 판결을 내렸다. 2015년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반하는 한정위헌 결정이 나올 것을 우려해 법원행정처에서 관련 문건을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두 기관의 묵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법조계도 선뜻 답을 내리지 못한다. 헌재는 변형 결정 중 하나인 한정위헌 역시 엄연한 위헌 결정이라고 하지만, 대법원은 한정위헌 결정을 헌법과 법률에 없는 불명확한 개념이라고 맞선다. 헌재법에 한정위헌 관련 근거 등을 마련하는 입법 조치가 거론되지만 이 역시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한정위헌의 기속력을 인정해야 하는지를 두고는 법조인들도 다른 의견을 낸다. 헌재 연구관 출신 변호사는 “변형결정의 기속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명문 규정을 둔다면 갈등이 정리될 것”이라고 했다. 반면 부장판사를 지낸 변호사는 “법률 해석에 관한 부분은 사법 독립의 차원에서 법원만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는 사이 헌재 결정례로 ‘재판소원금지조항에 해당되지 않는 재판’은 쌓이고 있다. 헌재법은 법원의 재판을 헌법소원 청구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지만, 헌재는 그동안 3회에 걸쳐 한정위헌 등 위헌 결정에 어긋난 판결은 헌법소원이 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놨다.
재판소원 역시 견해가 갈린다. 해외 사례를 봐도 독일은 재판소원을 허용하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한국사회가 한정위헌을 인정해야 할지, 재판소원을 허용해야 할지 여부는 기본권 보장에 가장 좋은 방향을 고민해서 결정할 문제”라며 “다만 지금의 양쪽 갈등은 영역 다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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