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쓰레기 같은 말

2022. 7. 30.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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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밥솥은 필수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그 흔한 밥솥이 없다. 좁아터진 원룸에 사는지라 밥솥을 올려둘 공간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까짓 밥솥, 수납장을 하나 사서 올려두면 그만 아니냐 말씀하신다면 그야말로 모르는 소리. 주방용 물품을 하나둘 늘리다 보면 방이 아닌 주방에 사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고래 등 같은 소파와 침대를 들여놓지 않음은 물론이요, 먼지 한 톨에도 공간을 내어 주기 아까워 나름대로 청소도 열심히 하며 산다.

좁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것이 또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내 마음이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사소한 일들도 나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돼 화석처럼 굳어진다. 특히 누군가 신경을 긁는 말을 하면 그것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서는 상대방을 두고두고 미워한다. ‘이주윤’이 아니라 ‘주윤발’이라고 출석을 부르던 중학교 담임 선생님을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리고, 명절날 텔레비전 앞에 앉아 ‘머털도사’를 보고 있는 나더러 ‘머털이’를 닮았다고 놀리던 친척 오빠를 생각하면 여전히 울컥할 정도이니, 밴댕이 소갈딱지와 자웅을 겨룬대도 승리는 나의 것임이 분명하다.

요 며칠 저기압인 이유 역시 그놈의 말 때문이다. 얼마 전 기분 좋게 나갔던 자리에서 몹시 언짢은 충고를 들었다. 술김에 실수로 한 말이겠거니 넘겨 보려 했지만 소인배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귓가에 끈적하게 들러붙은 그 말은 좀처럼 지워질 줄 몰랐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가도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샤워를 하다가 그 말이 떠올랐던 어느 날은 칫솔 대신 청소 솔을 잡고서 화장실 타일을 뻑뻑 문댔다. 뱃살을 출렁이며 청소하는 거울 속 내 모습이 퍽 꼴사납기는 했으나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화병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청소는 내리 몇 시간째 이어졌다. 쉰내 나는 이불이 세탁기에서 돌아가는 동안 창틀에 끼어 있던 묵은 먼지도 닦고, 가스레인지를 점령하고 있던 기름때도 닦고, 냉장고 칸막이도 꺼내어 윤이 나게 닦았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닦을 밀대를 꺼내려 수납장을 여는 데 재활용 쓰레기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다른 집안일은 후딱 해치우면서도 어두침침한 지하 주차장에 마련된 분리수거장에 내려가는 일만은 왜 이리도 마뜩잖게 느껴지는지. 다음에, 다음에, 하며 쑤셔 넣어 뒀더니만 어느새 산더미처럼 쌓여 버린 것이다.

“짜증 나 미치겠네, 진짜!” 참아 왔던 말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어지럽게 흩어진 캔이며 페트병을 신경질적으로 주워 담아 수납장에 도로 처박아 두고서는 씩씩거리는데 언젠가 들었던 법륜 스님의 조언이 머릿속을 스쳤다. 누군가 당신에게 봉지 하나를 줬다. 선물인가 싶어 열어봤더니 쓰레기만 가득 들어 있다. 버리면 그만인 것을 손에 쥐고서 수시로 열어 보며 화를 낸다면 그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말 중에도 쓰레기가 있다. 나쁜 말은 말의 쓰레기다. 누군가 당신에게 집어 던진 말의 쓰레기를 움켜쥔 채 괴로워하지 말아라. 쓰레기를 버리듯 그저 버려라.

안 그래도 좁은 마음에 쓰레기 같은 말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으니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좁은 집을 넓게 쓰려면 물건을 들이지 않아야 하듯 좁은 마음을 넓게 쓰려면 쓸데없는 말도 품고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 나쁜 말로 가득 찬 쓰레기장 속에서 이 쓰레기 저 쓰레기 들춰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굳게 닫혀 있던 수납장을 열었다.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재활용 쓰레기를 싹 내다 버리는 김에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나쁜 말들도 함께 털어 내기로 마음먹었다.

재활용 쓰레기로 가득 찬 봉지를 양손에 쥐고 분리수거장으로 내려갔다. 두고 가면 대신 버려 주겠다는 관리인의 친절을 한사코 마다하며 쓰레기를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캔 하나를 깡 소리 나게 버리며 주윤발이여, 안녕. 병 하나를 쨍 소리 나게 버리며 머털이여, 안녕. 플라스틱 한 무더기를 우르르 소리 나게 쏟아 버리며 언짢았던 충고들이여, 모두 안녕. 몇 번의 작별인사 끝에 쓰레기를 모두 털어 냈다. 빈 봉지를 말아 쥐고 발길을 돌렸다. 양손이 가벼워져서인지 마음이 가벼워져서인지 알 길은 없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사뿐했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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