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에 서예·풍경화 가미한 '추상 자연'

2022. 7. 2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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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추테춘
‘넘버 51-숲에 가려진 1000개의 생명들(No. 51-Mille vies se cachent dans le bois, 1960년)’. 2018년 5월 26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2900만홍콩달러(약 48억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
서양 유화를 받아들인 근대 아시아 화가들에게 가장 큰 마음의 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아시아 예술가로서의 뚜렷한 정체성을 담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시각적으로, 또 철학적으로 서양화가들과 구분돼야 한다는 점이었으리라. 이는 중국의 근대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운데 서예와 중국 전통 풍경화에서 새로운 회화의 해답을 찾아 중국 회화 기법과 서양 추상화를 혼합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 오늘날 자오우키와 더불어 중국 추상화의 대가로 추앙받는 이가 추테춘(Chu Teh-Chun, 1920~2014년)이다.

그는 지난해 홍콩 경매에서 약 2억3000만홍콩달러(약 385억원)라는 낙찰가로 아시아 추상화가 가운데 자오우키 다음으로 높은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원래 중국 출생으로 1935년 미술학교에 진학해 서예와 전통 중국화와 더불어 1세대 파리 유학파 스승에게서 유화를 배웠다. 그러나 중국 내전으로 부모를 잃는 비운을 겪은 데다, 공산당 지배 체제가 되자 1949년에 대만으로 이주해 그곳 대학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하지만 언제나 현지에 가서 서양화를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하고자 열망했던 그는 드디어 1955년, 서른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 교수로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과감하게 파리로 향했다. 그의 선택은 옳았다. 파리에 정착한 이듬해 그는 자신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로 파리 살롱에서 입상한다. 또한 현지에서 서양 추상 화가들 작품을 탐색한 지 불과 5년여 만인 1960년대 전후로 ‘추상 자연’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새로운 형태의 추상화를 개발하면서 1960년 파리 갤러리 개인전을 발판으로 탄탄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

1960년작 ‘넘버 51-숲에 가려진 1000개의 생명들’을 보자. 이 작품은 서양의 기하학 추상화 특징과 서정적인 중국 풍경화의 혼합을 통해 추테춘이 창조해낸 ‘추상 자연’이라는 그만의 독창적인 추상화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형태와 색상을 사용하되, 이를 자신의 심상에 비친 대로 단순화하는 동시에 서양 기하학적 추상화 특질을 도입해 재구성했다. 또 여기에 전통 중국 풍경화와 서예의 자유로운 표현 요소를 가미했다. 푸른색, 푸른 초록, 진한 초록의 끝없는 변주는 울창한 숲을 연상시키면서 강하고 힘찬 검정 선들과 대비를 이룬다. 그러는 한편 견고한 형태와 빈 공간의 뚜렷한 대조를 통해 음양의 대조를 상징하며 자연을 중시하는 아시아 정신을 성공적으로 담아냈다.

‘No. 195, 봄이 오기 전에(No. 195, Avant Le Printemps, 1965~1966년)’.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의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 2020년 12월 2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3600만홍콩달러(약 60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1964년 미국 카네기 미술관 전시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이후에도 예술을 향한 그의 새로운 모색은 계속 이어졌다. 그 예로 1965~1966년에 그린 ‘No. 195, 봄이 오기 전에’가 있다. 60여년에 걸친 오랜 커리어 동안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내 그림의 영감은 전적으로 자연이고, 내가 자연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또 자연이 나로 하여금 어떻게 느끼게 하는지를 그린다. 기본적으로 내 그림은 자연과 내 영혼의 혼합이다’라고 그가 말한 것처럼.

이 작품에는 자연과 더불어 음악적 영감이 바탕이 돼 있다. 1964년 어느 날, 추테춘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의 음악을 우연히 들었다. 해 돋는 바다의 풍경을 모티브로 작곡한 ‘바다-관현악을 위한 세 개의 교향적 소묘’였다. 이 곡을 자연에 관한 웅장한 교향곡이라 느낀 그는 기존에 구현해온 추상화와 서예와 산수화의 결합에 더해 자연의 소리를 회화에 도입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적 어휘를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이 작품에 착수했다. 결과적으로 추테춘은 서예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로운 붓질을 통해 리듬과 멜로디, 톤, 색채, 면, 선, 점들을 연결해 이제 막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려고 하는 이른 봄의 풍경 같은 ‘봄이 오기 전에’를 완성했다. 풍경, 파도 소리 같은 자연의 여러 측면을 포착해 마치 드뷔시가 자연에 대한 교향곡을 썼던 것처럼. 그가 이 작품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지는 2012년 ‘추테춘: 추상 속의 자연’이라는 제목의 자신의 개인전 도록 커버로 선택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기 추상화에서 나아가 모든 관습적 제약에서 벗어난 데다, 심리학적 풍광의 비구상적 재현을 위해 꾸준히 자연에서 영감을 추구하면서 자연의 형태를 자신의 감정에 대한 추상적 묘사로 변형시킨 이 작품은 반세기가 넘도록 한 개인의 소장품으로 간직돼왔다. 2020년 12월 2일 처음으로 시장에 나오자 예상대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약 3600만홍콩달러(약 60억원)에 낙찰됐다.

‘눈의 현혹(Vertige Neigeux)’. 1990년부터 1999년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 2016년 11월 26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9200만홍콩달러(약 153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예술적 도전을 멈추지 않고 1970년대에도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추상 풍경화를 선보인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는 ‘설경’ 연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85년 스위스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가던 길에 눈보라 치는 광활한 알프스 산맥을 보고 깊은 감명을 얻어 이듬해부터 시적이면서 깊은 울림을 주는 숭고한 설경 연작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눈의 현혹’은 설경 연작 기법이 무르익은 1990년부터 1999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정성을 다해 제작한 작품이다. 눈보라 치는 풍경의 웅장한 아름다움을 창조한 이 기념비적인 대형화는 추테춘의 전작 가운데서도 상당히 완성도 높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각각의 붓질, 점과 선 간의 거침없는 연결로 물리적 공간을 대체하고 에너지의 순간적인 형상을 구현해냈다. 묘사적인 붓질 대신 자유롭게 표현된 점과 선이 공간의 깊이감을 자아내며,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광활하고 웅장한 자연의 풍광을 관객 눈앞에 펼쳐놨다. 한마디로 유기적인 추상 형태에 관한 탐구와 혁신에 있어 그가 일궈낸 높은 경지의 완숙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9호 (2022.07.27~2022.08.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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