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의혹' 닮은꼴..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유죄된 이유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사초(史草) 폐기’ 논란으로 정가를 뒤흔든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안 삭제 의혹’에 대해 대법원이 10년 만에 유죄를 확정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전자결재한 남북정상 간의 회의록 초안을 포함한 문서관리카드(파일)를 대통령기록물로 인정하면서다.
이는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의 ‘서해 공무원 피살 첩보보고서 삭제 지시’ 의혹의 수사 및 향후 재판과도 맞닿아 있다. ‘보존해야 할 기록의 범위’와 ‘관련자 삭제 행위’의 유·무죄 판단의 기준이 되는 판례이기 때문이다.
‘NLL 포기 발언’ 의혹에서 ‘사초(史草) 실종’ 논란으로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8일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및 공용전자기록 손상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비서관(문재인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의 재상고심에서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들은 2008년 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수정·보완 지시에 따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안이 담긴 문서관리카드를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에서 삭제한 혐의를 받았다.
‘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논란은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당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2007년 10월 노 전 대통령이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 회의록 중 일부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지금 서해 문제가 복잡하게 제기되어 있는 이상에는 양측이 용단을 내려서 그 옛날 선들 다 포기한다. 평화지대를 선포, 선언한다. (후략)”
노무현 전 대통령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설치하기로 하고 그것을 가지고 평화 문제, 공동번영의 문제를 다 일거에 해결하기로 합의하고 거기에 필요한 실무 협의 계속해 나가면 내가 임기 동안에 NLL 문제는 다 치유가 됩니다. NLL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
국정원의 회의록 공개에도 ‘원본’을 확인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국회는 대통령기록관에서 회의록 초안을 열람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새누리당은 ‘사초 폐기’라며 노무현 정부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옛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에서 회의록 초본(草本) 파일을 본문으로 첨부한 문서관리카드가 백 전 실장 등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보고 이들을 기소했다.
회의록 초본은 2017년 10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다녀온 직후 조명균 당시 안보비서관이 작성해 노 대통령에게 e지원을 통해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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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수고 많았습니다. 재검토로 합니다”→ 5번 재판 끝에 유죄
이 사건은 약 10년 동안 5차례 재판이 이어지며 유·무죄가 뒤바뀌었다. 회의록 초본을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있는지, 그래서 이를 삭제한 게 기록물 관리법 위반으로 볼 수 있는 지였다.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은 2015년 1·2심에선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결재권자의 ‘결재’가 이루어졌을 때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된다고 봤다. 노 전 대통령은 문서관리카드에서 회의록 파일을 보고 나서 ‘처리의견’란에 “수고 많았습니다. 다만 내용을 한 번 더 다듬어 놓자는 뜻으로 재검토로 합니다”라고 적고, ‘열람’ 항목을 눌렀다.
1·2심은 ‘열람’을 누른 건 초본의 내용을 승인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작성자에게 반환하면서 그 내용을 재검토해 수정하도록 지시했다고 판단해 초본은 대통령 기록물로 생산되지 않았고, 기록물을 무단으로 폐기했다는 혐의에도 무죄를 선고했다. ‘열람’과 ‘재검토 지시’는 결재권자의 ‘결재’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2년 전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노 전 대통령이 재검토를 지시한 건 “이 회의록 내용을 열람했고 확인했다”는 뜻이니 회의록 초안을 공문서로 만들겠다는 의사가 있었다는 취지에서다. 또 회의록 초안은 후속 업무처리의 근거가 되는 기록이기 때문에 보존해야 할 공용전자기록이라고 봤다. 서울고법은 대법원의 유죄 취지에 따라 지난 2월 파기환송심에서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에게 각각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공문서 작성 과정에서 최종본을 작성하는 재료가 된 ‘로데이터’에 가까운 문서라도 실질적인 결재가 이뤄졌고,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면 임의로 삭제해서는 안 된다는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박지원 ‘서해 보고서 삭제’ 의혹 영향 끼칠까
박 전 원장의 ‘서해 공무원 피살 첩보보고서 삭제 지시’ 의혹은 ‘기록 삭제’ 여부가 논란이라는 점에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건과 혐의 및 구조가 닮아있다. 박 전 원장은 2020년 9월 어업지도원 이대준씨가 서해상에서 북한군에게 피살당한 사건이 ‘자진 월북’이라는 정부의 결론에 불리한 국정원 보고서를 삭제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는다.
박 전 원장은 “국정원 서버에서 자료를 삭제해도 토대가 된 원 첩보생산처(국방부) 서버에 공무원 피살 당시 북한군 감청 특수정보(SI) 원본은 남는다”고 반박하지만, 이번 판결로 원본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삭제 지시만으로 불법성이 인정될 수 있을 것이란 시각이 높다.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이 삭제한 회의록 초안 역시 국정원에 있는 회의 녹음파일을 토대로 작성한 회의록을 일부 수정한 것이지만, 유죄가 선고됐기 때문이다.
‘월성 원전 1호기 문건 삭제’ 의혹 재판에서도 주무 공무원들의 기록 삭제가 쟁점이다.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월성 원전 관련 전자파일 530건을 삭제한 혐의로 기소된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은 재판에서 “최종본이나 공식 자료까지 지우지 않았고 중간 부분만 지우라는 지시를 받아 행동에 옮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검찰은 “의사결정 변경 과정을 확인하는 게 당시 감사의 목적인만큼, 삭제한 중간단계 문건도 핵심적”이라는 입장이다. 한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삭제하려는 목적이나 경위 등이 진상을 은폐하려고 한 것인지를 입증하는 것도 수사의 쟁점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수민 기자 kim.sum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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