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할래?" 러 발레리나 한국땅 밟은 8개월뒤..돌변한 대표
“매일 울면서 밥도 못먹고 불안감에 떨었어요. 아직도 카톡 알람이 두려워요….”
한국 생활을 얘기하던 엘레나(22·여·가명)의 손이 떨렸다. 지난해 에이전시 대표 A씨로부터 협박 메시지를 받았던 순간을 얘기하면서였다. ‘고국(러시아)으로 돌아가라’,‘너의 비자를 만료시키겠다’,‘출입국 관리소에 신고하면 2주 안에 수사해 너는 쫓겨날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메시지에 엘레나는 공포감까지 느꼈다고 했다. 엘레나는 “대표의 협박과 공갈에 ‘나는 나쁜 사람인가, 살아선 안 되는 존재인가’ 하고 자책하기도 했다”라며 “지금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부푼 꿈 안고 한국 온 러시아 발레리나
A씨는 한국에서의 청사진을 엘레나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했다고 한다. 신원보증으로 엘레나가 신속히 예술흥행비자(E6)를 받을 수 있게 후원했다. 같은 여성이라는 점도 신뢰감을 더했다. A씨를 믿게 된 엘레나는 그해 5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오자마자 대기업의 가전제품 광고에 출연했고 화장품 광고도 찍었다. 모델 일에 빠르게 적응하면서도 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한 터라 엘레나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다고 한다.
지난해 1월 문제가 생겼다. A씨가 엘레나 앞으로 들어오는 촬영 제의를 거절하기 시작한 것이다. 엘레나가 “지인들과 술자리가 있는데 너도 와라”,“이번 주에 글램핑 하는데 참석하라”는 A씨의 제안을 연이어 거절한 뒤였다고 한다. A씨의 행동은 일감을 끊는 데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엘레나의 몫이 70%로 책정됐던 수익배분 방식도 50%로 동의 없이 바꾸고, 계약 해지금 1억원을 요구했다는 게 엘레나의 주장이다. 엘레나가 거부하자 A씨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사무소에 엘레나와의 고용계약을 해지하겠단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비자가 만료되면 고국으로 돌아가야하는 상황.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협박성 발언으로 빈사 상태였던 엘레나에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고생 말고 돌아와라.”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엄마는 딸을 염려했다. 엘레나는 싸움을 선택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외국인 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물러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행복했던 기억도 그를 움직였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A씨를 고소했고 대한상사중재원에 ‘전속계약을 무효로 하고 받지 못한 촬영 금액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일자리를 잃고 불안감에 떨던 엘레나에게 힘을 얻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3월 대한상사중재원 중재판정부가 엘레나와 A씨가 맺은 전속계약이 효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A씨가 엘레나에게 24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정하면서다.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 판정은 법원의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있다. 한 달 뒤 서울중앙지검이 A씨를 공갈미수 및 횡령 혐의로 불구속기소 하면서 엘레나의 상태도 조금씩 나아졌다고 한다.
법적 소송 남았지만 “꿈 잃지 않겠다”
엘레나를 돕고 있는 이지은 변호사(법률사무소 리버티)는 “일부 에이전시가 외국인들이 한국어에 서툰 점과 비자 스폰서란 지위를 이용해 불법을 관행처럼 저지르고 있다”며 “외국인 연예인 지망생의 꿈이 꺾이지 않도록 비자 제도를 개선하고 불량 연예기획사들을 감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1년 반째 일감을 잃은 상태에서 법적 소송이 이어지고 있지만, 엘레나는 “좌절하지 않겠다”고 했다. 최근 유용범 한국문화콘텐츠창작협동조합 이사장의 도움으로 에이전시를 구한 그는 E6 비자를 재발급받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갔다. 출국 전 기자와 만난 그는 “내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고 했다. “다시 한국에 가면 외국인 피해자가 더 생기지 않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도 고민해보려고 해요.”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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