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기 골프서 5500만원 잃어..친구가 건넨 건 '마약커피'였다

김준희 2022. 7. 2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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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경찰청 심남진(가운데) 마약범죄수사대장과 김명현(왼쪽 두 번째) 마약수사팀장이 28일 전북경찰청 기자실에서 설명회를 열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과 사기 혐의로 조폭 B씨와 커피에 약물을 탄 C씨는 구속, 이를 도운 D씨와 E씨는 불구속 상태로 각각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 전북경찰청

경찰, 마약법 위반·사기 등 4명 檢송치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도저히 못 칠 것 같은데…."(A씨)
"야, 내가 어렵게 (선수들) 섭외했는데 네가 빠지면 어떡하냐."(B씨)

지난 4월 8일 오전 6시30분 전북 익산의 한 골프장. 자영업자 A씨(52)는 이날 라운딩에 나서기 전부터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십년지기'인 조폭 B씨(52)와 그가 소개해 준 C씨(56), D씨(63)와 판돈 6000만 원가량을 건 내기 골프를 하는 날이었다.

이들은 이날 18홀을 도는 게임에서 각자 평균 타수에서 넘치는 타수만큼 판돈을 걸었다. 한 타당 30만 원으로 시작해 나중엔 200만 원까지 올렸다.

'내기 골프'를 설계한 사기단 차량에서 발견된 신경안정제 '로라제팜'. 김준희 기자


"커피 마신 뒤 기억 가물가물"…6000만원 잃어


몸에 이상을 느낀 A씨가 친구 B씨에게 "게임에서 빠지겠다"고 했지만, B씨는 "(평균 타수) 80대 중반인 네 실력이면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다독였다. A씨가 "어지럽고 힘들다"고 호소할 때마다 B씨 등은 중간중간 얼음물과 진통제를 갖다 주며 게임을 강행했다.

게임 전반까지 B씨 등과 대등한 경기를 한 A씨는 5홀부터 샷이 급격히 무너졌다. 게임 결과는 A씨의 참패. 스코어는 A씨 104타, B씨 83타, C씨 75타, D씨 83타였다.

이날 내기 골프에 진 A씨는 하루아침에 골프장에 가져간 현금 3000만 원을 포함해 게임 중간에 B씨에게 빌린 2500만 원까지 모두 5500만 원을 잃었다.

게임이 끝난 뒤 A씨는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오후 10시쯤에야 눈을 뜬 A씨는 이날 본인이 어떻게 골프를 쳤고,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다. 이튿날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아무 증상도 없다"고 했다. A씨는 문득 전날 내기 골프를 치기 전 식당에서 커피를 마신 뒤 몸 상태가 나빠진 상황이 떠올랐다.

경찰이 확보한 '내기 골프 사기 사건' 증거. 사진 전북경찰청


소변서 신경안정제 '로라제팜' 성분 나와


B씨 등 나머지 일행은 아침 식사로 우거짓국을 먹었고, 따로 퍼팅 연습을 하고 뒤늦게 합류한 A씨는 C씨가 건넨 아메리카노를 마신 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설마 누군가 커피에 약물을 탄 건가.' 이를 수상히 여긴 A씨는 경찰서를 찾아가 소변 검사를 받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분석 결과 A씨 소변에서 마약류인 '로라제팜' 성분이 나왔다.

1977년 출시된 로라제팜은 아티반(Ativan)으로 불리는 신경 안정제로 항불안제와 예비 마취제 등으로 쓰인다. 국내에서는 의료용 마약류로 분류돼 의사 처방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내기 골프는 A씨 돈을 노리고 B씨 일당이 사전에 치밀하게 설계한 사기극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B씨는 지난해 8월부터 서너 차례에 걸쳐 지인들과 함께 A씨와 골프를 치며 신뢰를 쌓았다. 이때는 1인당 10만 원 정도를 내놓고 게임을 했기 때문에 A씨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서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B씨 일당은 A씨를 상대로 내기 골프를 하기 전 ▶호구 물색(피해자 섭외) ▶약사(약물 커피 제조) ▶꽁지(금전 대여) ▶바람잡이 등의 역할을 맡았다.

'내기 골프' 당시 사기단 중 한 명이 피해자가 마실 커피에 약물을 타는 모습이 찍힌 골프장 폐쇄회로TV(CCTV) 영상 분석 결과서. 김준희 기자


사기단 "커피에 설탕 탔다…정상적인 플레이" 부인


이들이 내기 골프를 한 골프장 식당 폐쇄회로TV(CCTV) 영상에는 당시 C씨가 A씨가 마실 커피에 몰래 로라제팜을 넣는 장면이 찍혔다. 해당 로라제팜은 E씨(63)가 의사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산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A씨와 함께 골프를 치며 바람잡이 역할을 한 E씨는 정작 내기 골프에선 빠졌다.

경찰은 C씨 차량에서 범행에 쓰인 로라제팜 150알을 확보했다. 경찰은 B씨 일당이 범행을 공모하고 입을 맞춘 통화 내용 등을 바탕으로 이들이 처음부터 A씨를 범행 대상으로 삼고 돈을 가로챈 것으로 결론 냈다.

하지만 B씨 일당은 "커피엔 설탕을 탔고, 우리는 정상적인 플레이를 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고 경찰은 전했다. 전북경찰청은 28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과 사기 혐의로 조폭 B씨와 커피에 약물을 탄 C씨는 구속, 이를 도운 D씨와 E씨는 불구속 상태로 각각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심남진 전북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장은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B씨 일당의 통화 내용과 골프장 부킹 내용 등을 토대로 여죄를 수사 중"이라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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