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의 시시각각] 쿠오 바디스, 프레지던트?
전략가가 그들의 메시지를 관리
대통령 말에는 국가 비전 담겨야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회고록(『Tony Blair A Journey』) 앞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총리 질의응답을 일주일에 한 번, 30분으로 바꾸기 위해 선거 전에 계획을 세웠다. 공약 선언문에는 총리 질의응답의 효율성을 높인다고 다소 솔직하지 않게 기술했다.’ 영국에서 ‘PMQs(Prime Minister’s Questions)'라고 불리는 이 질의응답은 총리가 의회(하원)에서 야당 의원들의 공격적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매번 BBC가 생중계한다.
언어 구사력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달변의 정치인 블레어가 PMQs를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였다(그 뒤 25년째 계속 한 번이다). ‘총리 질의응답은 총리 재임 시절 중 가장 긴장되고, 당황스럽고, 조마조마하고, 공포스럽고, 위축되는 경험이었다. 영화 ‘마라톤맨’에서 사악한 나치 의사 역할을 맡은 로런스 올리비에가 더스틴 호프만의 치아에 구멍을 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수요일 오전 11시45분쯤이면 나는 총리 질의응답 30분을 그 장면으로 바꾸어 생각하곤 했다.’ 블레어의 회상이다.
블레어 못지않게 말 잘하는 웅변가 정치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말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었다. ‘가장 두려워한 것은 나의 ‘개프(gaffe)'였다. 이것은 무지, 부주의, 모호함, 둔함, 악의, 천박함, 거짓, 위선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통념과 동떨어진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어 공격의 빌미를 주는 표현을 언론에서 일컫는 말이다.’ 그의 회고록(『A Promised Land』)의 한 대목이다.
블레어가 PMQs를 주당 1회로 축소한 1997년 집권 초기에 그는 영국 국민 70%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노동당의 총선 압승으로 의회는 절대적 여대야소였다. 이런 호시절이었는데도 반대 세력과 언론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오바마가 품었던 것과 비슷한 걱정을 했을 것이다.
회고록에는 블레어가 PMQs 준비를 꼼꼼히 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주요 이슈에 대한 정보 취합, 논란의 대상이 된 일의 사실 여부 확인, 예상 질문과 답변 작성 등의 업무를 여러 명의 참모진이 나눠 맡았다. 블레어는 각 이슈의 대응 방향을 언론인 출신 측근인 앨러스테어 캠벨과 의논했다. 블레어의 답변은 철저히 사전에 준비되고 계산된 것이었고, 의회 문답에서 대부분 판정승을 거뒀다.
캠벨의 공식 직함은 총리실 공보수석이었는데 실제 역할은 홍보나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2003년에 그가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뉴욕타임스는 ‘블레어의 톱(top) 이미지 전략가 사임’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기사에서는 그를 ‘영국 정부의 2인자(the second most powerful man)’로 소개했다.
캠벨은 연설문에 넣어야 할 단어와 빼야 할 표현을 총리에게 주문했다. 침묵할 때와 나서야 할 때를 구분해 줬고, 정책 발표 전에는 의미를 부여해 강조할 곳과 반대 논리를 극복할 포인트를 짚어 줬다. 오바마 곁에도 비슷한 역할을 한 데이비드 액설로드라는 인물이 있었다. 블레어 회고록에는 ‘그 순간 내게 필요한 것은 앨러스테어의 조언이었다’ ‘나는 연설 전에 방해받는 것을 몹시 싫어했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앨러스테어의 말이라면 (TV를)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등의 표현이 나온다. 말과 태도로 메시지 관리에 철저했던 블레어는 총선에서 세 차례 이기고 10년간 집권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출근길 문답'을 한다. 축약된 PMQs다. 기자들이 중요 사안에 대해 묻는다. 질문은 매일 다르지만 바탕은 “이 나라를 어디로 이끌려는 것이냐(쿠오 바디스, 프레지던트)”는 물음이다. 국가 운영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조금씩 국민에게 각인시킬 기회인데, ‘기강 확립’ ‘위법 대응’ 등의 절실히 고민하지 않은 듯한 답이 등장한다. 추락한 지지율 정체가 지속한다. 불행의 무한궤도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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