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유랑 85년, 이제는 끝내야
[임병식 기자]
'결정 1428-326cc(1937년 8월 21일).' 문서 한 장이 시작이었다. 소련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살던 고려인 강제 이주를 결정했다. 고려인 17만 명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실어 나르는 계획이다.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일본인과 외모가 비슷하기에 첩자 활동을 방지한다는 게 첫 째였다. 또 자치구 요구를 차단하고, 중앙아시아에 부족한 노동인구를 공급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을 높인다는 목적이었다. 고려인들은 한순간 장기판 졸 신세가 됐다. 먹고살기 위해, 일제 압제를 피해 연해주에 정착했던 그들은 모든 걸 버려둔 채 떠나야 했다.
기차에 오른 1937년 10월, 누구도 기약 없는 디아스포라(이산)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가야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종착지까지 6700~6800km에 이르는 거리를 40여 일 동안 달렸다. 지금 세대들에게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로망이자 버킷 리스트다. 85년 전, 고려인들에게 시베리아 횡단은 목숨과 맞바꾼 고난의 행로였다.
시베리아는 10월이면 겨울이 시작된다. 창문도 없는 화물차를 타고 한 달여를 달렸다. 앉은 자리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 멈출 때마다 철로 주변으로 뛰쳐나갔다. 먹을거리는커녕 마실 물조차 턱없이 부족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많은 이들이 속절없이 숨졌다. 기록에는 2만5000~3만 명이 숨졌다고 적고 있다. 품 안에서 숨진 아이를 묻지도 못한 채 벌판에 던지며 참담했다.
그렇게 시작된 유랑은 올해로 85년째다. 국회의장 정무비서관으로 재직할 때 고려인 문제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고려인 정착을 돕는 '사단법인 너머' 활동가를 만나 실태와 현안을 청취하고, 경기도 안산 고려인 마을에 다녀오기도 했다. 또 정세균 의장을 수행해 고려인대회에 참석하고 재외동포법 개정에도 힘을 보탰다.
▲ 우슈토베 알마티에서 360km를 달려 도착한 우슈토베 |
ⓒ 임병식 |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를 찾았다. 우슈토베는 고려인 이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첫 기착지이자 첫 정착지, 첫 경작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고려인들이 첫 발을 내린 곳이 우슈토베다.
▲ 첫 정착지 표석 고려인들이 처음 정착했던 바슈토베에 설치된 표석 |
ⓒ 임병식 |
고려인들은 우슈토베 역에서 7km 떨어진 바슈토베에 정착했다. 그들은 거주 이전 자유가 없었다. 정해준 곳에서만 살아야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역에서 내려 현지인들이 사는 마을을 거쳐 바슈토베로 이동했다.
▲ 고려인 공동묘지 바슈토베에 있는 고려인 공동 묘지 |
ⓒ 임병식 |
'조응선 묘(1871년 출생, 1951년 사망)', 녹슨 묘지명이 눈길을 끈다. 가늠해보니 66세 되던 해 우슈토베에 도착했다. 망해가는 조선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카자흐스탄 우슈토베까지 신산한 유랑이다. 더운 바람이 묘지를 휩쓸고 지났다. 묘지 한 가운데서 민들레를 떠올렸다.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 내리고 꽃을 피우는 민들레가 강인한 고려인을 닮았다.
지금은 우슈토베에도 고려인이 드물다. 통역과 가이드를 맡은 강우한 치과의사(37)는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대도시 알마티로 나갔다. 기억하고 증언할 이들이 자꾸 사라진다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 사브리나 목사 당시 생활했던 고려인 집안 내부를 설명하는 사브리나 목사 |
ⓒ 임병식 |
사브리나 목사 또한 일생을 유랑했다.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중장년을 보낸 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을 거쳐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사브리나 목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다.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후손들에게 알려주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고 강조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를 끝으로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강제 이주와 관련된 세 곳을 모두 돌아봤다. 사단법인 돌바내 회원들과 3년 전 다녀온 블라디보스토크 라즈돌노예 역은 강제 이주 열차가 출발한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독립운동 거점 기지였다.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지낸 최재형과 이상설, 안중근 의사는 이곳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안중근은 최재형의 도움을 받아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했다. 신한촌에서 멀지 않은 크라스키노(延秋)에는 '동의단지동맹비(同義斷指同盟碑)'가 있다. 독립지사 12명이 1909년 2월 같은 날 약지를 자른 것을 기념한 비석이다.
▲ 신한촌 연해주 독립운동 거점 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
ⓒ 임병식 |
10여 년 전 찾은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김병화 농장 또한 강제 이주 흔적이 남아 있다. 강제 이주 열차에 올랐던 17만 명 가운데 6만 여명이 이곳에 뿌리내렸다. 김병화는 공화국 노력영웅을 두 차례 받은 신화적 존재다. 국가 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사람은 흔치 않다. 그것도 고려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한 결과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남의 나라, 그것도 공산주의 소련에 도움을 준 게 대수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우슈토베 고려인들이 황무지를 옥토로 일궜듯, 김병화는 타쉬켄트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들을 민들레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으로 불러야할까.
그러면 고려인 문제는 끝난 것인가. 새삼 고려인과 강제 이주를 환기시키는 이유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경구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과 우리 피 속에는 한민족이라는 DNA가 흐른다. 그들이 뿌리 내리지 못한 채 겉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다.
소련은 스탈린이 사망(1953년)후 1955년 고려인에 대한 정치적·법적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이후 고려인들은 거주 이전 자유를 되찾았다. 기나긴 유랑 끝에 찾은 할아버지 땅이다. 경계인으로 사는 그들을 이제는 우리가 품어야 할 때다. 토인비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 틈바구니에서 다시 쓰라린 유랑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어떠해야 할까. 우슈토베 고려인 공동묘지 한가운데서 생각에 잠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입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대통령 관저 공사, 김건희 여사 후원업체가 맡았다
- "귀국 때 대리검사까지" 악몽이 된 이탈리아행 어린이 연주단 활동
- 전범기업 재판부에 전달한, 외교부의 수상한 의견서
- 내 인생 두 번째 파리, 이번엔 시부모님도 함께였다
- "대법 판결에도 12년 째 하청 뒤에 숨는 원청... 정부·국회 뭐했나"
- 치매 노인 4명이 차린 '주문 잊은' 제주 식당
- 저는 제국시대 일본 군인들을 만났습니다
- "좋은 취지"라더니... 선정성 논란에 결국 마늘광고 내렸다
- 대통령실, '무속인 법사' 이권개입 의혹에 "필요시 확인해 조치"
- 23일만에 끝난 '권성동 천하', 몰락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