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동 화랑농장이 유명식당 상표?..상이용사 피눈물 담긴 사연 [Focus 인사이드]
1951년 중공군의 춘계 제2차 공세(혹은 제6차 공세)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전선이 고착화하기 이전까지 1년간 6.25 전쟁은 남쪽의 낙동강에서 북쪽의 두만강까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서울의 경우 무려 4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아무리 한반도의 종심이 짧다고 하더라도 세계 전쟁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경우였다. 그만큼 6.25 전쟁 최초 1년은 상당히 격렬했다.
전쟁보다 더 지독한 생활고
전선의 변동이 컸던 덕분에 한반도 전체는 그야말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그런 상태에서 1953년 정전으로 전쟁이 일단 막을 내린 이후부터 피해를 복구하는 일은 제1의 과업이 되었다. 더불어 죽거나 다친 많은 참전군인에 대한 보상 또한 커다란 문제로 대두했다. 하지만 전쟁 전부터 이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이들에 대해 즉각적이고 충분한 보상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차라리 전사자는 시간을 두고 유가족에게 보상해줘도 되지만, 몸이 불구가 된 상이용사들은 당장의 호구지책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국가나 사회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없기는 매한가지여서 상이용사들의 처절한 절규에 당장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전후에 사회로 복귀한 제대군인, 특히 경제적으로 자활이 어려웠던 상이용사들의 불만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됐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인식이 바뀌었고 법적으로도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선천적, 후천적으로 신체가 불편한 사람을 깔보고 비하하는 못된 풍조가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상이군인들을 속어로 깨진바리라고 불렀을 정도로 차별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몸까지 불편한 이들이 도움은커녕 사회적으로 냉대까지 받으니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당연했다.
결국 국가가 즉각적인 보상이나 구호를 하기 힘들면 이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줘야 했다.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던 대책 중 하나가 화랑농장사업이었다. 사회 적응이 힘들었던 상이용사와 가족들이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집단 거주지와 농장을 제공하는 것이 골자였다. 내용은 그럴듯하지만, 황무지에 상이용사들이 자력으로 집을 만들고 농지도 개간해야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욕을 먹어도 할 말 없는 미봉책일지 모르나 당시 기준으로는 최선의 대책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사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먹고살기 힘들었을 만큼 그때는 모두가 어려웠다. 어쨌든 한미재단의 도움을 받아 상이용사 출신인 김국환씨와진상구씨의 주도로 현재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에 화랑농장으로 명명된 집단촌 조성 사업이 시작됐다.
해당 지역은 구한말에 20여 가구가 살던 장끝말이라고 불리던 작은 동네였으나, 일제가 1939년에 원주민들을 내쫓고 일대를 조병창으로 만들었다. 조병창은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다가 1949년 철군 후 국군 병기대대가 사용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이 ASCOM이라는 군수지원시설을 설치하고 다시 이용하게 됐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그 크기가 현재 부평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2019년 반환돼 현재 오염물질을 제거 중이나 1960년대까지만 해도 ASCOM은 미국 본토의 포트 브래그, 포트 후드, 서독의 프라이드리히펠트와 더불어 미군의 4대 군수기지 중 하나였을 만큼 거대한 인프라였다. 화랑농장은 이곳 귀퉁이를 떼어 만들어졌다. 1955년 3월 5일 개소식에 당시 최재유 보건부장관, 이익흥 경기도지사는 물론 맥카오 주한미군 후방지원 사령관 등이 참석하였을 만큼 기대가 컸다.
기대 속 출범했지만 달동네로 전락
그러나 정부의 지원이 없다 보니 얼마 가지 못해 자금난에 봉착했고 결국 1958년께 문을 닫았다. 이후 방치된 농장에 많은 외지인이 몰려와 정착하게 되는데 대부분이 ASCOM에서 흘러나온 물자를 유통하거나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이들이었다. 그러면서 화랑농장은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몰려있는 전형적인 달동네로 급속하게 변했다.
국가를 위해 몸 바쳤지만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해 스스로 자활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상이용사들의 처절한 피눈물이 담겨 있는 흔적은 비록 그렇게 사라졌지만, 일대는 지금도 화랑농장이라고 불린다. 산곡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의 노선판에 화랑농장이라 쓰여 있고 도로명도 화랑로다. 그런데도 화랑농장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아는 이가 많지 않고, 오히려 주말 전원농장이나 유명한 식당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한적한 산골 마을인 장끝말이 외세에 의해 사라진 이름이 됐듯이 지난 70여년간 계속 이어 온 화랑농장이라는 이름도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바뀔 것이다. 더구나 조만간 대대적인 재개발이 예정됐기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일부 모습마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짧게나마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망각해서는 곤란하다. 어떻게든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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