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양복 만들다 세탁소 차려 "철거 전날까지 일해야지"

정숙희 2022. 7. 26. 12: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선유리 충현세탁소 사장 이충현씨

[정숙희 기자]

 충현세탁소 이충현(67) 사장.
ⓒ 정숙희
1970-1980년대는 맞춤양복점이 잘 되던 시기였다. 당시 양복점 재단사는 신랑감으로도 인기가 있었다. 고급 기술자로 봉급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1990년 들어 기성복이 대유행하면서 양복점은 점차 사라지고, 그 많던 재단사들도 세월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파주시 문산읍 선유리 기지촌에서 미군양복 기술자로 시작해 재단사, 맞춤양복점 주인, 세탁소 사장으로 세월과 변화를 견뎌 온 이충현(67)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미군 양복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다
 
 1979년 개업한 양복점 미광사 앞에서
ⓒ 이충현
- 선유리에서 60년 넘게 사셨어요. 어떤 동네인가요?
"여기 미군부대가 있었지. 캠프 펠헴이라고. 나중에 게리오언으로 바뀌었는데. 알씨포(RC#4)도 있었어. 그 안에 야구장, 볼링장, 클럽... 별 게 다 있었어. 미군은 포병, 보병, 기병 9개 부대가 주둔했으니까 잘은 몰라도 만 명은 넘었을 거야. 게네들이 근무 끝나고 저녁시간에 나오면 여기 신작로(사임당로)가 미군들로 꽉 찼을 정도니까."

- 어떻게 하다가 미군 양복을 만들게 되었어요?
"중학교 막 졸업하고서니까 열일곱 살이었나. 그때 부모님이 고향 떠나와 객지에서 힘들게 사시는데 누나가 셋이지 동생들도 있는데 장남인 내가 학교를 다니느니 돈이나 벌자 그랬던 거지."

- 그때 양복점 이름 기억나세요?
"뉴욕양복점. 나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었지. 같이 입사한 애들은 열다섯 살 그랬어. 처음에는 심부름하니까 월급으로 받았고... 2500원 했나? 한 3년 일하면서 미싱 기술 배우고 나서는 객공이라고 만드는 개수대로 받았지. 바지는 하루에 서너 개 이상 만들고 우와기(상의)는 한 개 만들면 많이 만들어. 어깨 여기가 공이 많이 들어가거든. 바지는 하나에 250원 받았나..."

- 얼마동안 일하셨어요?
"거기서 군대 갈 때까지 했고... 군대 가기 바로 전에 동북기업이라는 데서 잠깐 일했지. 미군양복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한 백 명 정도 일했어. 전부 월급 말고 객공으로 받는 거야. 군대 갔다 와서는 문산 모드양복점이라는 데서 한국인 양복을 만들었지. 거기서는 재단사로 일했지. 동북기업에서는 미싱 기술, 모드에서는 양재 기술, 원단 공급 이런 거 배웠지."

- 양복 만드는 '공장'이 있었군요?
"그때는 그런 양복 공장이 많았어. 왜냐하면 그때 당시 미군부대는 안에 양복점이 다 있었는데 '강 건너' 부대는 그런 게 없었거든. 그러면 영업하는 사람이 치수 재는 줄자 가지고 들어가는 거야. 조그맣게 점방을 차려 놓고 미군이 양복 맞추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어깨, 기장 이런 거 치수 재 가지고 봉일천 일대 양복 공장에 맡겨서 만들어갖고 납품하는 거야.

우리도 주문이 많아서 맨날 엄청 바빴어. 그때 '양복쟁이'라고 친구들한테도 인기가 많았지. 보기만 하면 술 사달라고 쫓아오는 거야. 하하하. 그때 족쟁이도 있었어. 신발 만드는 사람. 미군들이 양복 맞출 때 구두도 같이 맞추니까 족쟁이도 좀 알아줬어."

- '강 건너' 부대는 어디를 말하는 걸까요?
"저기 장단반도, 다리 건너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런 데는 전방이니까 아무래도 부대가 작지. 뭘 하려면 여기로 외출 나와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거야. 거기에 미군사격장이 있었는데 나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이 탄피 주으러 다녔어. 탄피가 신주야. 그거 팔면 돈이 됐거든. 근데 걸리면 잡혀 가. 우리 부모님도 한 번 그랬던 적 있었고."

양복점하다가 세탁소로 바꿔서 사업
 
 이충현 씨와 40년 함께 한 기계들
ⓒ 정숙희
- 미군 양복 만드는 일은 어땠어요?
"'미군 일'은 한국 기술하고 좀 달라요. 한국은 바느질이라든가 원단, 안감을 뭘 쓰냐, 이런 걸 따지는데 게네들은 그런 거보다는 색깔, 화려한 패턴, 디자인, 숄 같은 장식 달고, 쎄무, 가죽, 이런 걸 좋아해요. 어떤 미군은 아예 <GQ> 잡지를 가져와 보여주면서 '이런 스타일로 해달라' 그랬지."

- 양복점 개업은 언제 하셨어요? 
"스물다섯에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어. 선유리에 미군 양복점 자리가 났다고. 79년이었는데 미군이 철수하니까 가게들도 문을 닫고 나가는 거야. 보증금은 없고 월세가 4만 원이었나. 이름은 미광사. 요 옆에 중국집 자리였지. 한 2년 하고, 요 옆에 미장원 자리로 옮겨서 충현라사로 이름 바꾸고 그때부터 한 20년 했지."

- 그때는 신용카드가 없을 때인데 수금은 잘 되었나요? 
"요즘처럼 신용카드로 받았으면 돈 벌었지 하하하. 오죽하면 그런 말도 있었어. '오늘은 현찰, 내일은 외상', 벽에 써 붙여 놨지. 하하하. 그때는 거의 외상거래였어. 한참 있다가 한꺼번에 주는 사람도 있었고, 선금 받고 나머지는 할부로 매달 얼마씩 끊어 받는 사람도 있었고."

- 세탁소로 바꾸신 건 언제쯤인가요? 
"1998년. 지금 이 자리가 나서 옮겼지. 그때 대기업이 만든 기성복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까 이제 양복을 맞춰 입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야. 세탁소 한 지도 벌써 20년 되어가네."

- 오래 함께 한 기계들이에요. 
"이거는 드레스미싱, 이거는 '오바로크' 일제야. 이건 다이알. 이건 브라더. 동북에서 그만두면서 가져온 거. 장사 안 하게 되면 집에 다 가져갈 거야.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을 거야."

- 선유리도 이제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서 도로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었잖아요... 토지나 건물 보상도 많이 진전되었대요. 늦어도 올해 말이면 사장님 세탁소도 철거 되지 않을까 예상을 하시던데 이후에 뭐 하실지 계획이 있으세요?
"그러게 (보상이) 절반쯤 되었다고 하대. 나야 뭐... 철거되는 전날까지 일할 거야. 그러고는 생각 안 해봤어. 돈 좀 주면 뭘 좀 해보고 아니면 말고 하하하. 근데 세입자한테 많이 주겠어?"

선유리에도 1990년부터 주공아파트 건설을 시작으로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도로확장이 불가피해졌다. 파주시는 2019년 '국지도 78호선 선유구간 도로확장' 계획을 세우고 토지매입 공지를 발표했다. 현재 사임당로(선유리 433-15부터 선유리 267-39까지) 도로변의 상가가 절반 정도 토지매입이 진행되었고 늦어도 2023년까지는 철거가 완료될 예정이다.

인터뷰하는 동안 세탁을 맡기거나 수선을 맡기는 주민이 띄엄띄엄 들어왔다. 딸이 사준 블라우스 품을 줄여달라는 할머니, 아이 옷 길이를 늘려달라는 아기엄마... 이충현씨는 '이런 건 고치기 힘들다'고 했다가도 다시 이리저리 궁리해보고는 며칠에 찾아오라며 요일을 알려준다.

양복 기술 하나만을 긁어 파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온 이충현씨. 짐을 던 지금은 욕심도, 후회도 없다. 하루하루 손님 요구에 성실하게 응하며 마음 편안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게 삶의 진리인 것을 아는, 작지만 큰 사람 이충현씨. 수고 많으셨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또 재미나게 살아질 남은 생에 응원을 보낸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