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가 해고한 방송작가 2명에게 일어난 특이한 일
[이은혜 기자]
카일 스티븐스의 명언,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돌아온다"는 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건이 방송가에 생겼다.
최근 A와 B방송작가가 거대한 방송사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겼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4일 MBC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해고 재심 판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MBC) 패소를 판결했다. 이제 두 사람은 법리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최초의 방송작가가 됐다.
A와 B작가의 이야기는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MBC <뉴스투데이>의 작가로 10년여를 일하다 지난 2020년 6월, 전화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여기까지 읽고 의아한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다. 유수의 방송사에서 10년을 매일 출근한 사람을 그렇게 구두로 해고한다고? 사실 방송업계에서 이런 상황은 드문 일이 아니다. 현직 업계 종사자로서 마음이 아리지만 그게 현실이다. 나 역시 방송작가로 살면서 갑작스러운 해직 통보를 받아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평이하다. 특이한 일은 해고 이후에 일어났다.
▲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가 14일 오후 2시30분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
ⓒ 손가영 |
두 작가는 서울 지방노동위원회를 찾아갔다. 서울지노위는 두 작가의 신청을 각하했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다. 2021년 3월, 중앙노동위원회는 A와 B작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MBC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부당해고 재심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방송작가유니온, 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노조 대구MBC비정규직다온분회,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많은 기관과 단체에서 비판 성명을 내놓았지만 MBC는 행정소송을 강행했다. 그리고 2022년 7월, 2년여의 긴 법적다툼 끝에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늘 방송가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던' 존재인 방송작가들이 처음으로 방송사를 이겼다.
그날은 내게도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판결이 나온 날 방송과 회의, 장거리 운전으로 안색이 노리끼리해져 현관문을 여는데 카카오톡 알람이 울렸다. 소송 당사자 A 작가였다. 그녀와 나는 좀 특이한 사이인데, MBC 해고 사건 이후 글과 행동을 통해 서로를 응원하고 연대하며 연락을 주고받게 된 관계다. 반가운 마음에 스마트폰 메신저 창을 열어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작가님, 저 이겼어요."
황급히 휴대전화 캘린더의 일정을 확인했다. "작가님들 선고 공판"이라는 메모가 보였다. 이겼구나. 이겼어. 정말 잘됐다. 따위의 말들을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답장을 보내는데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방송작가가 방송사를 상대로 승소했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업계에서 30여 년을 일했던 대선배 작가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일은 없었다.
▲ MBC '뉴스투데이'에서 10년 간 일하다 부당해고된 두 작가가 14일 꽃을 들고 있는 모습. |
ⓒ 손가영 |
두 작가는 패소 자체보다 방송작가 후배들에게 안 좋은 선례를 만들게 될 것을 걱정했다. 그게 무서워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고도 토로했다. 바라는 것은 매일 출근하던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는 것뿐인 두 사람이 법원의 판결, 그것도 1심을 받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MBC가 이번에는 부디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기를. 이제라도 두 방송작가를 노동자로 인정하기를. 거액의 돈을 들이는 소송전에 앞서 방송 인력의 노동 환경부터 진지하게 고민하기를. 어쩔 수 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게 된다. 나 역시도 과거의 해고 당사자이자, 현재 방송업 종사자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렇다.
A와 B작가의 일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다. 비슷한 루트로 해고를 겪은 작가를 내 주변에서 세어보기만 해도 열 명은 족히 된다. 서울 전체의 방송사와 외주 제작사로 범위를 넓힌다면? 아예 전국단위로 확산해서 생각해본다면? 천 명의 방송작가에게서 천 개의 사례가 나올 것이다. 방송작가들은 이미 너무 오래 참아왔다. 서울에서, 전주에서, 광주에서 사라졌던 작가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 방송사와 노동자성을 두고 다투고 있다.
시대가 변했다. 이번 판결이 그 증거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기를 쓰고 역행할 것인가. 이제는 방송사가 답할 차례다. 카일 스티븐스의 명언을 재구성해본다.
"방송작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강력한 주체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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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gracefulll)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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