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기, 중년 여성 고통 왜 더 큰가" 조경란 소설의 항변

신준봉 2022. 7. 2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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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가족 사정』을 출간한 소설가 조경란. 코로나 시기 고통받는 중년 비혼 여성들의 실상을 주로 그렸다. 김성룡 기자

4년 전 겨울 소설가 조경란은 거주지인 서울 봉천동 동네 초입의 허름한 식당에서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발견했다고 했다. '가정 사정으로 쉽니다.' 가정 사정에는 대체 어떤 일들이 포함되는 걸까. 그것들과 개인 사정은 어떻게 다른가. 식당은 끝내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슬프고 안타까웠다. 24일 인터뷰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슬픔과는 별개로 궁금증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곧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모든 집과 사람에게는 사정이 있다." 딱한 사정에 관한 한 이야깃거리는 얼마든지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소설집 제목을 딴 표제작 단편 '가정 사정'으로 시작해 '개인 사정'이라는 단편으로 끝나는 연작소설집 『가정 사정』(문학동네)이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이다.
딱한 사정이라는 주제를 공유하다 보니 『가족 사정』은 통상적인 연작소설과는 다르다. 소설집 안의 여덟 편 단편 사이에 같은 장소나 같은 인물이 반복해 등장하지 않는다. 앞 소설의 이야기가 뒤 소설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가정 사정'을 발견한 2018년과 소설책이 나온 2022년 사이 세상을 짓눌렀던 코로나가 직간접적으로 소설의 인물들을 쥐어짜고 이야기를 비틀어 댈 뿐이다.

작가 조경란씨의 새 소설집 『가족 사정』.


여덟 편이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특정 인구집단이 소설집에 자주 나온다. 이들이 소설책에 연속성을 불어 넣는다. 40~50대 여성들이다. 소설집에서 이들은 "아버지와 기술과 젊음"이 없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가진 것이라야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 정도. 비혼인 경우가 많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의 주인공 상희가 그렇다. 쉰 살인 그는 면접 정장 전문 매장을 다닐 때만 해도 스스로 세상에 운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처음 경험해보는 안전한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직장을 잃고 나자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다. 주방보조, 가사 도우미를 전전하다 급기야 거리로 내몰린다. 오피스텔 모델하우스 앞에서 행인들에게 갑 티슈를 건네는 일이다. 얼굴까지 익히게 된 인력사무소 대표는 이런 말로 상희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
"코로나가 아줌마 같은 사람들한테 남긴 게 뭔지 아세요? 벼랑입니다, 벼랑." (194쪽)
조경란은 "코로나 한복판에서 어떤 사람들이 제일 아프고 당황스럽고 절박할까 생각해봤다"고 했다. 이렇다 할 기술 없이 늙은 부모와 함께 사는 50대 비혼 여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가라는 타이틀만 없다면 자신이 거기 해당하겠더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더이상 남 얘기가 아닌 것이다.
상희들은 소설 속 남성 캐릭터들에 비해 왜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 반대여야 하지 않나. 코로나 시기 취약 계층일수록 우선적으로 생존 한계선상으로 내몰린다는 사회학 보고, 언론 보도는 그동안 차고 넘쳤다. 작가가 다큐를 제작하는 사람은 아니다. 1996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조경란은 그간 하지 않았던 일에 손댔다.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이웃의 이야기로, 사회 전체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다. 『가정 사정』이 그 결과물이다.

조경란 소설은 그동안 인물 개인의 사정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새 소설집 『가족 사정』에서 이례적으로 개인 주변의 이웃, 공동체 전체로 시야를 확장했다. [사진 박기호]


조경란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생각보다 취약하다"고 했다. "강하고 단단한 것 같지만 아주 작은 일로도 쉽게 흔들리는 유약한 단위"라는 것이다. 가정의 울타리로도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는 중년 비혼 여성들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모른다. 있다 해도 묻어두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소설이 실용적인 효용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경란은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거나 연민하는 일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작가가,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통받는 사람 곁으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삶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에 도달하는 각자의 길이 결국 작가의 스타일일 텐데 조경란 소설은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 경우다. 소설을 읽는 물리적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라도 한다는 듯 주의 깊은 독서를 요한다.
조경란은 말했다. "소설집을 통틀어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한마디를 선택하라면 '분명한 한 사람'에 나오는,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이 한 사람은 있다는 메시지다."
내 편이 없다면 스스로 자신을 응원하면 된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분명한 한 사람'에는 이런 문장도 나온다.
"뭔가를 써보고 나면 그 경험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 안에 무엇이 깃들어 있고 웅크리고 있는지." (153쪽)
죽은 상담 선생이 생전 오숙에게 해준 충고다. 써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이다. 동어반복이지만, 어떤 커다란 슬픔도 복잡한 고민거리도 거리를 두고 보면 객관화된다는 얘기다.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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