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손에게 수박 한 조각 건네는 인심이 여태 살아있다니
[이돈삼 기자]
▲ 벼논과 어우러지는 방풍림. 짙게 물든 나무와 벼가 여름날을 대변하고 있다. |
ⓒ 이돈삼 |
백방산(198m)과 사이산(162m)이 에워싸고 있는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초호리다. 그 마을을 지난 17일 다시 찾았다. 계절을 달리해서, 초록이 짙어가는 여름날이다.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쏟을 듯한 날씨다. 저만치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하늘은 희끄무레했지만, 방풍림은 여전히 늠름하다. 버드나무와 팽나무, 느티나무의 이파리도 무성하다. 흡사 마을을 지키는 문지기나 장승 같다.
방풍림 주변으로 꽃이 많이 피었다. 참깨밭에는 깨꽃이 하늘거리고 있다. 호박꽃, 참외꽃도 피었다. 넝쿨 사이로 어린 호박과 참외가 얼굴을 내민다. 가지런히 서서 키재기를 하는 고추밭에는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돌담에 기대어 핀 능소화의 자태가 요염하다. 돌담을 기어오른 계요등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하얗게 핀 인동초는 노랗게 변해가고 있다. 한적한 농촌이다.
▲ 돌담에 기대어 핀 초호마을의 능소화. 길가에서 길손의 눈길을 끈다. |
ⓒ 이돈삼 |
▲ 방풍림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 마을 어머니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
ⓒ 이돈삼 |
줄지어 선 고목 아래에 정자가 들어서 있다. 계단 아래에는 주인을 닮은 신발이 여러 켤레 놓여 있다. 마을에 사는 어머니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한 어머니가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며, 길손에게 수박 한 조각을 건넨다.
"고맙습니다. 여기가 어머니들 쉼터인가요?"
"날마다 이렇게 모여서 놀아. 수박도 먹고 이야기도 하면서. 남자들 쉼터는 저쪽이여."
어머니가 가리키는 방풍림 반대편에 정자가 더 있다. 아버지들의 쉼터다. 100여 미터 떨어진 정자에선 바쁜 일을 끝낸 어르신들이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 있다.
▲ 들독과 표지석. 품앗이의 상징인 들독은 마을에 전해지는 유물 가운데 하나다. |
ⓒ 이돈삼 |
초호마을은 '써레시침'의 전통도 이어오고 있다. 써레시침은 모내기를 하려고 논바닥을 고르는 써레를 깨끗이 씻는 의례다. 모내기를 끝내고, 써레질의 고통을 잊으려고 하루 즐기는 풍속이다.
"언제부터 했는지는 몰라. 근디, 지금도 하고 있어. 모내기 끝내고 마을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풍년을 비는 날이여." 길손에게 수박을 건넨 어머니의 말이다.
초호마을은 품앗이의 전통도 잇고 있다. 일손이 필요하면 네 일, 내 일을 가리지 않았다. 마을을 청소하고 가꾸는 일도 매한가지다. '우리'라는 공동체를 함께 꾸려가는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간척지가 드넓다. 1930년대에 간척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전부 바다였다. 방풍림이 뭍과 바다의 경계였다. 초호리도 바닷가 마을이었다. 줄지어 선 고목은 나룻배를 묶어둔 계선주(기둥)였을 것이다.
▲ 꽃이 핀 참깨밭과 어우러진 윤철하 고택의 대문간채. 마을의 맨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
ⓒ 이돈삼 |
▲ 윤철하 고택의 대문간채 사이로 고목이 보인다. 마을 앞으로 줄지어 선 방풍림 가운데 한 그루다. |
ⓒ 이돈삼 |
이곳에 윤두서의 후손이 살고 있다
마을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옛집도 초호마을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옛집은 윤철하의 고택이다. 5년 전 윤탁 가옥에서 윤철하 고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안채 상량문에 남은 기록을 보고, 1906년 당시 건립자인 윤철하의 이름을 붙였다. 윤탁은 1984년 문화재 지정 당시 소유자다.
▲ 공재 윤두서의 옛집. 초호마을에서 가까운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 있다. |
ⓒ 이돈삼 |
윤철하 고택은 조선 말기 호남지방 상류주택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산 아래 경사진 자리에 지어진 점이 색다르다. 대지를 3단으로 만들어 건물을 배치한 이유다.
집은 안채, 별당채, 사랑채, 대문간채로 이뤄져 있다. 대문간채는 1912년에 지어졌다. 대문간채 안으로 정원과 넓은 마당을 뒀다. 남성들이 손님을 맞는 사랑채는 중간의 높은 석축 위에 지어졌다. 사랑채 왼쪽에 작은 목욕간을 둔 것도 별나다.
▲ 윤철하 고택 사랑채 앞에 흐드러진 향나무. 열매를 가득 매달고 있는 향나무가 눈길을 끈다. |
ⓒ 이돈삼 |
▲ 윤철하 고택의 사랑채. 나무와 꽃이 빼곡한 집의 정원이 아름답다. |
ⓒ 이돈삼 |
뒤쪽에는 중문채와 안채, 별당채가 자리하고 있다. 대문 밖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비밀스런 공간 같다.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는 1906년, 자식들이 쓰려고 지은 별당채는 1914년에 각각 지어졌다.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별당채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
▲ 초호마을 전경. 마을을 백방산과 사이산이 에워싸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간척 논이 펼쳐져 있다. |
ⓒ 이돈삼 |
초호마을은 북쪽으로 읍호리, 동쪽으로 황산리, 남쪽으로 송지면 금강리, 서쪽으로 백포리와 접하고 있다. 초지가 좋다고, 조선시대엔 '초평'으로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초호(草湖)'로 바뀌었다. 넓은 들이 푸른 호수처럼 생겼다고 이름 붙여졌다.
▲ 방풍림과 어우러지는 해남 초호마을. 벼논과 버무려진 풍광이 넉넉해 보인다. |
ⓒ 이돈삼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윤 대통령, 또 틀렸다... '반도체 15만 양병설'은 헛발질
- 대검찰청 이준 흉상...임은정 검사, 이 사진이 의미심장한 이유
- 기어코 '좌 검찰 우 경찰'... 윤석열 정부 속도전이 위험한 이유
- '욕쟁이'와 '바른 생활맨'의 싸움... 이게 목숨까지 걸 일인가
- 좋은 옷, 좋은 차... 잘나가던 그는 어쩌다 '밥 연대'를 시작했나
- 고물가 시대, 저는 시장에 들러 찾는 게 따로 있습니다
- '소년분류심사원'에서 만난 소녀가 보낸 쪽지 속 절절한 당부
- 윤 대통령 국정 지지율 하락세 주춤, 그 이유는?
- 이번엔 '셀프공천' 논란... 설훈 "이재명 해명하라"
- 윤 대통령, 경찰 집단 반발에 "행안부·경찰청이 잘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