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기념관에 누워있는 '백비'가 말하는 것

박기철 2022. 7. 2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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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사건, 그 의의와 한계 2] 양민 논쟁, 특별법, 명칭, 그리고 이후의 과제

[박기철 기자]

(이전 기사: 정부-사법부-국회의 핑퐁게임... 피해자들은 세상을 떴다 http://omn.kr/1zlbg)

거창 사건은 수많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 덕에 두터운 벽을 뚫는 송곳이 되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거창 사건은 이렇게 큰 의의를 가지고 있지만, 그 해결 과정에서 보여주는 한계점도 있었다. 이는 거창뿐 아니라 여러 학살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양민 VS. 비양민

1960년 6월 5일, 조일재 의원은 경남도지사실에서 울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울산은 특수하게 보도연맹과 양민이 섞여 있다'라고 말한다. 같은 해 6월 15일, 대구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북 유족회 결성대회'에 대구 계엄소장이 헌병과 사복경찰들을 이끌고 들이닥쳐 행사를 중단시켰다. 참가자들이 선량한 '양민 학살' 피해 유족이 아니라 보도연맹원 등 부역 혐의자 가족들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국가는 오랫동안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 중 하나로 피해자들이 양민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국가의 책임을 묻기 전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인정받는 데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게 되었다.

거창 사건도 처음에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라 불렸다. 그리고 유족들은 본인들이 양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그 방법 중 하나로 모든 선거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런 양민 논쟁의 기저에는 '비양민(빨갱이)'은 죽여도 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깔려 있다. 하지만, 적법한 절차 없이 처형당한 이들은 모두 국가의 폭력에 의한 희생자이다.

양민 논쟁은 피해자들 간의 서열과 분열을 조장하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 시민사회는 전국의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일부 유가족 단체에서 다른 유가족과 연대할 수 없다며 등을 돌린다. 자신들은 '양민'들이기에 보도연맹원 희생자 같은 비양민 유족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거창에서는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2000년부터는 합동 위령 사업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거창평화인권예술제도 있었다. 이를 주관하던 예술제 위원회는 유족회와 함께 전시, 공연 등 여러 활동을 펼쳤다. 시간이 지나며 위원회는 거창 사건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인식 전환과 연대로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자 했다.

이런 행보에 대해 거창 지역의 한 도의원은 지역사회가 예술제를 '빨갱이들의 행사'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추모공원 전시품에서 붉은색을 빼라고 하거나 한반도기는 인공기라는 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있었다. 거창 사건 유족들도 여기에 일부 동조하며 예술제 위원회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결국 2008년 이후부터 유족회와 예술제는 추모 행사를 따로 개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래 거창사건 추모공원에서 열리던 거창평화인권예술제는 현재까지도 다른 장소에서 열리고 있다.

이렇게 양민 논쟁은 진실규명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데 장애물이 되었고, 이는 가해 세력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은 '민간인(Civilian)'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행히 현재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표현이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
  
▲ 남원 강석마을의 위령비  2011년에 세워졌지만 '양민'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양민 논쟁은 아직도 남아있다.
ⓒ 박기철
 
특별법의 부작용

4.19 혁명 이후 국회는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구성했다. 이중 통영의 4대와 5대 국회의원이었던 최천은 경남지역 조사반장으로 통영과 거창 사건을 조사했다. 그런데, 그는 한국전쟁 당시 경남 경찰국장으로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또 다른 학살 가해자로 알려졌던 대구 경찰국장 출신 조재천도 당시 국회의원이 되어 있었다. 그는 오히려 억울하게 죽을 뻔한 사람들을 빼내 주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직간접적인 가해자였던 국회의원들은 사건을 축소하고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처럼 한국 전쟁 이후 각 지역 정치는 가해자들이 장악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유족들은 가해 세력들에게 진실규명을 호소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피해자와 가해자가 어느 지점에서 타협하는 경우가 생겼다. 진실규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면서 선거에 이기기 위해 이에 대한 공약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렇게 나온 타협의 결과물 중 하나가 개별 특별법 제정과 추모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특별법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이런 특별법은 해당 지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 모두 해결되었다는 착시효과를 가져온다. 한국전쟁 직후 거창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을 거창 경찰서와 상업은행, 양조장 등에 감금했다. 그리고 경찰은 1950년 7월 21일에는 합천군 묘산면 마령재, 27일에는 봉산면 권빈재 등에서 이들을 학살한다. 희생자는 확인된 것만 36명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특별법 제정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받은 '거창 사건'에 비해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였다.
  
▲ 과거 거창 양조장이 있었던 곳  여기에 보도연맹원들이 감금되었다. 현재는 시장으로 바뀌었다.
ⓒ 박기철
   
▲ 과거 상업은행 자리  여기에 감금되었던 이들도 희생되었지만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 박기철
 
그리고 이런 특별법은 다른 유족들에게 하나의 기준이자 목표가 되었다. 그래서 각각의 유족회들이 개별 특별법을 만드는 데 힘을 쓰다 보니 유족들 간 연대가 어려워지고, 지역의 가해세력과 타협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물론, 유족들의 가슴에 깊게 맺힌 억울함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고 해결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건을 이렇게 개별 특별법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또한, 정치적 목적에 따라 추진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특별법 제정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특별법에는 피해보상 방안이 빠져 있다. 그래서 유족들은 소송을 벌여야 했고, 계속되는 패소로 다시 상처받았다. 일부 국민들은 특별법까지 해줬는데 또 왜 저러냐며 유족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렇게 국가가 가끔씩 시혜적으로 제정해주는 특별법은 유족과 시민사회,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사건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드는 명칭
 
▲ 제주 4.3 기념관의 백비  언젠가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
ⓒ 박기철
  
제주 4.3 기념관 초입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고 누워있는 백비를 만날 수 있다. 훗날 4.3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이 완료되어 '정확한 명칭'을 얻게 될 때 여기에 새겨서 세울 것이라고 한다. 정확한 명칭이란,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이며 왜 일어났는지 그 맥락과 성격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이다.
   
거창과 노근리의 민간인 학살은 '거창 사건', '노근리 사건'으로 불린다. 이 명칭은 얼핏 가치중립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사실을 축소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

우선, '학살'이라는 단어를 빼면서 가해자에 대한 특정이 모호해진다. 이 덕분에 국가와 군은 책임 부담을 줄이고 사건의 성격과 맥락을 축소 왜곡할 수 있었다.

즉, 거창 사건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하나가 아니라, '일부 군인'들이 '거창'에서만 우발적으로 일으킨 국지적 사건으로 한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창사건 추모공원 홈페이지에도 가해자를 '일부 미련한 국군'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이런 모호한 명칭 역시 앞선 특별법 제정과 연결된 타협의 산물 중 하나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가 건강한 논의를 거쳐 명확한 명칭을 부여하는 것 역시 진실 규명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 거창사건 추모공원 홈페이지  '일부 미련한 국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현은 사건의 본질을 축소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군 수뇌부의 명령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기도 하다.
ⓒ 박기철
 
'국가에 의해' 죽은 사람들에 대한 명확한 기억의 보존

민간인 학살 사건은 진실 규명과 함께 이 기억을 유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추모 사업의 방향은 사회적 기억을 보존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거창 사건 추모공원은 사건 현장인 신원면에 약 5만 평의 부지에 위령탑과 묘지, 역사교육관 등의 시설들로 조성되었으며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도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접근성이 떨어져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차라리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피해 보상 재원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어땠을까?

2008년, 서울대 사회학과 김백영 교수는 이 공원이 '학살'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사건'과 '일부 군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오히려 국가의 책임과 본질을 희석시킨다고 비판했다. 또한, 공원의 공간배치가 마치 '국가를 위해' 죽은 이들을 위한 곳 같다고 말했다. 나 역시 하늘로 우뚝 속은 위령탑을 보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기억의 잘못된 형상화는 또 다른 왜곡이다. 그래서 앞으로 대전 골령골 등에 새로 만들어질 추모 시설은 '국가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이는 사건의 진실과 기억 보존, 그리고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남은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 18미터 크기의 위령탑  국가에 의해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보다는 국가를 위해 죽은 이들의 숭고함을 '기념'하는 다른 국립묘지의 그것과 유사하다.
ⓒ 박기철
 
[참고자료]
거창사건추모공원(사건전개과정)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김기곤(2009), <국가폭력, 하나의 사건과 두 가지 재현 - 거창사건의 기억과 문화적 재현과정>, 민주주의와 인권, 9(1):27-63
김백영&김민환(2008), <학살과 내전, 공간적 재현과 담론적 재현의 간극: 거창사건추모공원의 공간적 분석>, 사회와 역사, 0(78):5-33
정의상&최빛, <빨간 베레모, 채의진 평전>, 시사IN북
한성훈(2008), <기념물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와 집단 정체성-거창사건의 위령비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0(78):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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