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김은선 국내 데뷔무대, 오페라같은 스토리텔링 돋보여

2022. 7. 24. 14: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 김은선 서울공연
미국 메이저 오페라 최초 여성 지휘자로 각광
오페라 지휘자 답게 흐름이 좋은 음악 선보여
지난 2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을 마친 지휘자 김은선이 청중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립교향악단]


21일 밤 롯데콘서트홀.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2악장 매우 느리게(Largo)를 연주하고 있었다. 오보에보다 긴 목관악기인 잉글리시 호른이 익숙한 선율을 연주했다. 미국국립음악원장이 돼 조국 체코를 떠나있던 작곡가 드보르자크가 꿈에 그리던 고향의 모습이 살포시 떠올랐다. 이 주제가 목관과 금관의 연주 속에 뭉클하게 녹아들 때 당대의 드보르자크처럼 ‘미국의 이방인’인 지휘자 김은선(42)의 표정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 김은선이 국내 무대에 본격 데뷔했다. 연세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전공한 김은선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유학해 지휘를 공부한 이후 마드리드에서 열린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 오페라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각광받았다. 2011년 통영에서 베이스 연광철과 TIMF 앙상블의 무대를 이끌었던 적이 있었지만, 세계 음악계에 두각을 나타낸 이후 최초의 서울 무대로 기대를 모았다.

이날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헤어스타일로 등장한 김은선의 첫 지휘곡은 동시대 작품인 김택수의 '스핀-플립'이었다. 작곡가가 동명이인 탁구선수 김택수에 착안해 쓴 탁구 게임에 관한 곡이다. 관중의 환호, 공의 랠리와 스매싱도 표현했다. “김 작곡가는 본인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음악으로 풀어내는 재능이 있다. 리허설도 유연해서 재미있게 작업했다”는 김은선은 이 곡에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절도 있고 힘찬 동작과 적재적소의 지시로 정교한 음향을 만들었다.

스위스 첼리스트 크리스티안 폴테라가 협연한 20세기 작품인 루토스와프스키 첼로 협주곡이 뒤를 이었다.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최하영이 결선 무대에서 연주해 유명해진 곡이다. 서울시향은 김은선의 강렬하고 일사불란한 지휘에 따라 오와 열을 맞췄다.

유명 오페라 음악감독 김은선이 지난 2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 지휘자로 나서 절도 있고 정교한 음향을 이끌어냈다. [사진 서울시립교향악단]


김은선에게는 미국 메이저 오페라 최초 여성 지휘자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거기에 아시아계라는 약점도 극복한 전대미문의 경력으로 작년 뉴욕타임스의 클래식 부문 깜짝 스타에 선정됐다. 2018년 신시내티 오페라에서 지휘했을 때는 145년 역사상 첫 여성 지휘자였다. “손을 씻다 만난 노년 여성 비올리스트가 ‘내 평생 지휘자를 화장실에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고 하셨어요. 평소 제 자신이 동양인 여성 지휘자로 비쳐지는 걸 인지하지 않고 있지만 인식 변화에 일조한다면 긍정적이라고 여깁니다.”

작년 8월부터 임기를 시작한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토스카’와 ‘피델리오’를 지휘했다. 오페라 레퍼토리 선정, 스케줄 확정, 객원지휘자 및 성악가 캐스팅이 음악감독의 임무다. 경영진과 회의를 함께하며 오페라단 일 전체를 아우른다. 계약 기간은 5년. 길게 보는 것을 중시한다는 김은선은 마지막 5년 째에 오페라단의 예술적인 역량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를 항상 생각한다고 했다. 바그너, 베르디, 잘 알려진 곡과 현대곡 등 균형 있게 자신의 레퍼토리를 쌓아나갈 계획이다.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의 수석객원지휘자이기도 한 김은선은 지난 5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메트)에서 ‘라 보엠’을 지휘했다. 연세대 재학시절 리허설 피아니스트를 하다가 지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 김은선은 2025년 다시 메트 지휘대를 밟는다. “어디에든 잘 녹아드는 한국인의 특징”이라는 평소의 지론대로 세계 음악계를 누비고 있다.

2부의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이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재작년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을 다수 지휘했고 작년 시카고 그랜드 파크 페스티벌에서 교향곡 9번을 지휘한 김은선은 서울 데뷔무대에서도 이 곡을 선보였다.

1악장부터 김은선의 지휘봉에 곡의 여운이 살아났다. 단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주문하며 격려도 확실히 했다.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저음현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가 하면 몸을 낮게 숙이며 여린 음을 유도하고 만족스러웠는지 다시 엄지손가락을 보였다. 기관차처럼 거대한 관과 현을 온몸으로 제어하며 절도와 함께 특유의 곡선미를 그리는 지휘였다. 바이올린군의 연주에서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3악장에서는 빠른 템포로 복잡하게 얽힌 리듬의 마무리가 아쉽기도 했다. 4악장에서 당당하게 밀고 들어오는 금관의 위풍당당함이라든지 현과 관의 고급스러운 블렌딩은 일품이었다. 피드백이 확실해 연주를 잘 듣고 있다는 느낌이었고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향수를 잘 포착했다. 벼락같이 작열하는 팀파니와 금관이 불을 뿜는 모습은 서울시향에서도 오랜만에 만나는 호쾌함이었다.

김은선의 데뷔무대는 과연 오페라 지휘자다웠다.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흐름이 좋은 음악이었다. 객석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그가 지휘하는 오페라를 보고 싶어졌다.

김 감독이 이끄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는 내년에 창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와 공연을 앞두고 있다. 빈 국립극장, 암스테르담 오페라 지휘대에 서고 ‘라 보엠’으로 라 스칼라 오페라에 데뷔한다. 공연을 마치고 로비에서 연세대 시절 은사인 최승한 지휘자를 본 김 감독이 “선생님!”하며 안겼다. 그 순간은 평범한 스승과 제자의 정겨운 모습이었다.

류태형 객원기자·음악칼럼니스트 ryu.taehyu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