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암투병, 실끈 같은 인연.."삶은 예술이더라"

김희윤 2022. 7. 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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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타 치하루 개인전 '인 메모리(In Memory)'
'실 엮는 작가'로 명성, 붉은색 이어 흰색 실 대형 작품 공개
삶과 죽음 경계에 선 인간의 불안 표현, 한강 작가 소설 '흰'서 영감
내달 21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Shiota Chiharu In Memory, 2022 Dresss, wood boat, paper and thread, Overall dimensions variable. 사진제공 = 가나아트센터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조선시대 정월 열나흗날, 조상들은 시루떡을 찌고 그릇에 쌀을 가득 담아 숟가락을 꽂은 뒤 축원하고자 하는 사람의 나이만큼 긴 실을 둥글게 감아 서리는 ‘실(絲)공드리기’를 올렸다. 정초에 신수점을 보고 가족 중 운수가 사나운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수명을 지키고 길게 하려는 뜻을 담은 제의이자 오랜 풍속이었다.

‘실 엮는 작가’로 명성을 얻은 시오타 치하루(50)가 붉은 실에 이어 이번엔 하얀색 실로 엮은 대형 설치작품을 국내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진행되는 개인전 ‘인 메모리(In Memory)’는 지난 2020년 ‘비트윈 어스(Between Us)’전 이후 2년 만의 전시다. 작가는 두 차례의 암 투병을 통해 갖게 된 트라우마와 죽음에 대한 고찰을 실로 엮고 풀어내며 인간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엉키고, 또 얽히고, 끊어지고, 풀리는 실들은 인간관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끊임없이 나의 내면을 반영한다” 작가는 혈관처럼 이어진 실의 무리가 인간관계와 닮았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신이 느낀 불안과 관계성을 작품을 통해 표현했음을 고백한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이번 전시 메인 컬러를 흰색으로 쓰게 됐다고 말했다.

한강의 소설 ‘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소개한 작가는 “죽지마 죽지마 부탁할게”라고 울부짖는 작품 속 어머니의 마음이 암 투병 중 유산을 경험했던 자신과 겹쳐져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2005년 난소암 투병 중 임신 6개월이었는데 양수가 터져 병원에 가니 의사가 아이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해 충격을 받았었다”고 고백한 작가는 아이를 둘러싼 모든 것이 흰색이고, 또 자신이 흰색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도 많이 있어 흰색을 메인으로 한 작품을 꼭 해보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Shiota Chiharu, State of Being (Playing Cards), 2022, Metal frame, card game and thread, 70 x 35 x 35 cm. 사진제공 = 가나아트센터

관계성과 작가 내면을 드러내는 소재로서의 실이 우리의 전통 풍습 속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수(祭需) 였음을 떠올릴 때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한 작가의 간절함은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축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병마와 아픈 기억과 같은 사나운 운수를 씻어내듯 작가의 흰실은 촘촘하고도 켜켜이 전시 공간을 다채롭게 채우고 있다.

작가는 유년 시절 할머니의 무덤에서 느낀 공포, 이웃집에서 일어난 화재의 기억, 두 번의 암 투병으로 겪은 죽음에 대한 경험을 작품에 오롯이 투영한다. 유리와 그물 형태 구조물이 엉켜 있는 ‘Cell’연작은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를 형상화한 것으로 ‘혈관’, ‘세포’ 혹은 ‘피부’를 연상케 하는 그의 작업은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있던 작가 스스로가 불안정했던 시기에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는 죽음이 육체로서는 끝이지만 내면의 의식은 영원히 존재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오랜 경험과 고뇌를 통해 깨달았다고 말한다. 신체는 수명이 다해 사라지더라도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 즉 의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작품을 통해 설명한다. ‘부재와 현존’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의 작품들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과 같이 물리적으로 사라지더라도, 의식은 항상 자리에 남아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Shiota Chiharu, Cell, 2022, Glass and wire, h = 28, Ø 30 cm. 사진제공 = 가나아트센터

개인적 고민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작가는 동시대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경계와 개인의 존재 그리고 정체성과 기억에 대한 성찰을 작품을 통해 이어가고 있다. 한 공간에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실을 통해 작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를 넘어 실존을 향한 탐구를 시각적으로 써내려간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한 ‘In Memory>(2022)’는 기억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작가를 실존하게 하는, 또 우리를 현존하게 하는 삶의 일부로 전시장 중앙의 흰 배와 흰 옷을 통해 기억의 바다를 헤매는 인간의 여정을 은유한다.

작가는 “살면서 행하는 모든 것들이 내게는 예술”이라며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질 당시엔 이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해 작품으로 승화했을만큼 제게 예술은 곧 삶이고 예술을 하지 않은 것이 곧 죽음”이라고 강조했다. 전시는 8월21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진행된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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