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원성왕릉은 왜 '괘릉'이라 불리게 되었을까?

운민 2022. 7. 2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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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찾아가다 2-5] 운민의 경주별곡

[운민 기자]

▲ 신라왕릉 중 가장 화려한 자태를 지닌 괘릉(원성왕릉) 신라왕릉 중 가장 화려한 자태를 지닌 괘릉(원성왕릉)은 규모와 양식 모든 측면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
ⓒ 운민
부산 남포동에서 출발해 강원도 고성의 금강산 휴게소까지 동해안을 따라가는 490km의 7번 국도는 여행자들에게 선호도가 높은 루트로 알려졌다. 특히 삼척, 강릉, 속초구간은 동해바다의 매력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기에, 이 도로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여행 이상의 가치가 있다 여겨진다.

경주 역시 7번 국도가 속하는 구간이지만 아쉽게도 해변을 따라가진 않는다. 해당 구간은 경주와 울산의 관문 중 하나인 울산공항을 지나 산업단지를 관통하는 산업로라 좀처럼 여행의 기분이 들지 않는다. 더구나 도로를 점거하고 있는 화물차들의 존재는 썩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런 공단들도 모화를 지나면 점점 사라지고 평화로운 농촌의 풍경이 불국사 입구까지 이어진다. 허나 평범한 숲으로 보이는 이런 장소들의 한구석에는 숨겨진 신라 왕릉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시기로 살펴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들이 대부분이다. 신라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때였던 만큼 그들의 묘역은 신라의 다른 왕보다 화려하다. 시내에 자리한 다른 고분들처럼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아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화려했던 그 시절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불국동으로 들어가기 직전 신라의 묘역 중 가장 크고 아름답다고 알려진 괘릉으로 가보도록 하자.

경주를 종종 방문했던 사람이라도 괘릉이라 칭하는 낯선 이름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는 왕릉의 주인인 원성왕릉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왜 괘릉(掛陵)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을까?

원래 괘릉을 조성한 자리는 본래 동곡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이 절을 옮기고 숭복사로 개명했다. 그러나 봉분의 자리가 절의 연못이었던 터라, 그걸 메워 만드는 과정에서 바닥에서 샘이 지속적으로 솟아나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왕의 시신을 바닥으로 안치하는 대신 양쪽으로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안치하게 되었다. 그렇게 괘(掛)를 써서 지금의 명칭이 된 것이다.     
 
▲ 괘릉의 석물 괘릉에는 많은 석물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 무인성은 서역인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많은 학계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운민
원래 괘릉은 오랜 기간 동안 문무왕의 가묘로 알려져 있었지만, 숭복사터에서 절을 욺 겨 원성왕릉을 조성했다는 사실이 담긴 비편이 발견돼 사실상 이 릉의 주인이 원성왕임이 밝혀졌다. 대부분 신라의 왕릉이 봉분만 남아 있는데 반해 괘릉은 묘역과 석조물이 대부분 남아있어 경주의 비슷한 봉분이 아닌 것을 접하고 싶은 사람이 가보면 좋을 듯하다. 

잘 정비된 주차장에 내려 측면에 자리 잡은 묘역으로 입장하면 푸릇푸릇한 잔디밭에 위치한 위엄 있는 괘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얼핏 조선왕릉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석이다. 깊은 눈매에 코가 크고 우락부락한 모습이 다소 이질적이다. 봉분엔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쳐 있고 사자 네 마리가 자신의 방위로 머리를 돌려 왕릉을 지키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 원성왕은 원래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혜공왕이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는 명분을 들고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과 군사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 왕에 올라 선덕왕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점차 내리막길을 타게 된다. 선덕왕은 6년 동안 제위를 보내다 죽었고, 그의 동료인 김경신이 왕이 되니 그가 곧 원성왕이다. 그는 독서삼품과 등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점차 다가오는 쇠망의 기운은 막지 못했다. 하지만 신라의 문화적 역량은 이미 원숙해졌기에 그가 죽은 뒤 이런 왕릉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구정동 방형분의 내부 구정동 방형분은 내부를 살필 수 있는 몇 안되는 고분 중 하나다. 굴식돌방무덤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운민
다음으로 갈 곳은 불국사 로터리에 위치한 구정동 방형분이다. 길가에 있어 많은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가지만 무덤 내부가 개방되었기에 그 구조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봉분이기도 하다. 이 고분의 특징은 원형이 아니라 사각형인 방형 구조다. 방형 구조는 고구려 봉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양식이라 고구려 출신의 인물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더러 있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에 직접 들어가보는 경험은 오직 이곳에서만 가능하다.      

본래 경주의 고분은 널무덤 또는 덧널무덤으로 구덩이 안에 나무 덧널을 만들고, 그 속에 껴묻거리를 넣어 만든 무덤이었다가 천마총, 황남대총처럼 거대한 봉분을 올린 돌무지 덧널무덤의 형태로 발전한다. 말 그대로 돌무더기를 쌓아서 조성한 봉분이라 무덤을 다 파지 않는 이상 도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봉분에서 화려한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다.

시간이 흘러 신라가 고구려, 백제 및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무덤 안에 돌방을 만들어 안치하는 굴식 돌방무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통일신라 이후의 봉분들의 대부분이 굴식 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만큼 도굴에 무방비라 거의 대부분의 왕릉들이 도굴되었다 해도 무방하다. 괘릉, 구정동 방형분도 예외가 아니다.      
 
▲ 성덕왕릉 신라의 최전성기를 누린 성덕왕의 왕릉이다.
ⓒ 운민
하지만 구정동 방형분의 조그마한 돌방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역사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전시관으로 개조된 천마총과 다른 날것의 느낌이다. 다음 발걸음은 7번 국도를 타고 언덕을 넘자마자 보이는 성덕왕릉으로 이어진다. 논밭에서 조금 비껴나간 고요한 숲 속에 자리 잡은 성덕왕릉은 최근까지 접근이 쉽지 않았다. 묘역을 가르는 동해남부선의 철길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경주를 관통하는 철길을 부설하면서 수없이 많은 문화재에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 상처는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 성덕왕릉의 십이지상 성덕왕릉의 십이지상은 다른 왕릉들이 부조로 조성된 데 반해 여기는 조각상이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머리부분이 파괴된 채로 남아있다. 멀쩡한 원숭이상은 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 운민
철길을 지나 보이는 외로운 봉분은 성덕왕의 형인 효소왕의 릉이라 전한다. 그는 신문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해 향년 16세에 세상을 떠났다. 최근에는 이 무덤의 주인이 효소왕이 아니라 귀족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평범한 귀족이라기엔 당당한 자태가 서려있다.

다음으로 찾은 건너편 성덕왕릉은 신라의 최고 전성기에 재위했던 군주답게 제법 화려한 맵시를 뽐내고 있다. 비는 없어졌지만 그 받침은 아직도 남아있고, 봉분과 병풍석 난간석이 온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머리만 남은 석상과 봉분 둘레에 서있는 십이지상의 조각의 머리 부분이 대부분 파괴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7번 국도의 왕릉들을 살펴보니 통일신라시기의 전성기를 누렸던 군주들이 한눈에 엿보이는 듯하다. 그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배움이 있으니 경주에 한 번 온 김에 함께 둘러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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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경기별곡 2편)가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인문학 강연, 기고 문의 ugz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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