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조회' 수사관행에 제동..헌재 "통신자료 조회후 통지해야"

허정원 2022. 7. 21.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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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통신사가 수사·정보기관에 가입자의 이름·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개인정보를 제공하고도 정보 주체인 가입자에게 사후 통지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 현행법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왔다. 이 조항은 지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이른바 ‘저인망식 무차별 통신조회’사실이 밝혀지며 본격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됐다. 헌재는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취득 자체는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자료 취득 사실을 통지하는 절차가 법률에 마련되지 않은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사후통지 절차 등이 마련되면 가입자 몰래 무차별적으로 개인 정보를 가져가던 수사 관행에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헌재, “통신자료 취득 후 사후통지 절차 없는 것은 헌법 위반”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가운데)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21일 서울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7월 심판사건 선고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헌재는 21일 전기통신사업법 83조 3항 등이 위헌이라는 4건의 헌법소원 청구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불합치는 법 조항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즉각 무효로 했을 때 초래될 혼선을 막고 입법부가 대체 입법을 할 수 있도록 시한을 정해 존속시키는 결정이다. 헌재는 “이 사건 법률 조항에 대해 단순 위헌 결정을 하게 되면 법적 공백이 발생하므로 잠정 적용을 명하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하되, 늦어도 2023년 12월 31일까지 개선 입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제3항은 ‘전기통신사업자는 수사관서의 장·정보수사기관의 장이 재판·수사·형의 집행 또는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정보수집을 위해 통신자료제공을 요청하면 그 요청에 따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을 근거로 검찰과 경찰, 공수처, 군, 국가정보원 등은 법원 영장 없이도 서비스 가입자의 이름·주민등록번호·주소·전화번호·아이디(ID)·가입일 등을 이동통신사에 요청할 수 있다. 이에 수사·정보기관이 임의로 개인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관행을 법이 정당화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가입자는 스스로 조회해보기 전에는 자신의 개인 정보가 수사·정보기관에 제공됐는지 알 수 없다.

헌재는 “통신자료 제공 요청이 있는 경우, 정보 주체인 이용자에게는 통신자료 제공 요청이 있었다는 점이 사전에 고지되지 않으며 전기통신사업자(이동통신사)가 수사기관 등에 통신자료를 제공한 경우도 이런 사실이 이용자에게 별도로 통지되지 않는다”며 “정보 주체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통신자료 취득 자체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 아니라 통신자료 취득에 대한 사후 통지절차를 마련하지 않은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사 효율성 고려해도 사후통보 충분히 가능”


지난 1월28일 민간인불법사찰피해자모임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민간인 통신사찰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해당 헌법소원 청구는 지난 2016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참여연대 등이 다수의 수사·정보기관이 통신사로부터 가입자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수집했다며 청구인 500명을 모으면서 시작됐다.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제공 요청에 법원의 통제 절차가 없고, 개인정보를 유출 당사자가 그 이유조차 모른다는 점이 지적됐다.

특히 지난해 공수처가 이성윤 전 서울고검장의 공소장 내용을 단독 보도한 중앙일보 기자 및 해당 기자 어머니 등 언론사 기자와 민간인, 당시 야당 인사 등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통신 자료를 조회한 것이 드러나며 ‘사찰 논란’이 빚어졌다.

헌재는 수사 효율성을 고려하더라도 통신자료 취득 사실을 통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효율적인 수사와 정보수집의 신속성·밀행성 등의 필요성을 고려해 사전에 정보 주체인 이용자에게 그 내역을 통지하도록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면 수사기관 등이 통신자료를 취득한 이후에 수사 등 정보수집의 목적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통신자료의 취득 사실을 이용자에게 통지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법은 위헌, ‘통신 취득 행위’ 자체는 헌법 소원 대상 아냐”


21일 헌법재판소는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제3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했다. 사진은 판결문 일부 발췌. [헌법재판소]
다만 헌재는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요청·취득 ‘행위’에 대해선 헌법소원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위헌 여부도 판단하지 않았다. 헌법소원을 하려면 국가의 공권력 행사에 따른 기본권 직접 침해가 전제돼야 하는데, 수사기관이 통신자료를 요청하는 행위는 통신사가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도 어떤 법적 불이익을 받지 않으므로 공권력 행사가 아니라고 봐서다.

헌재의 이날 결정에도 수사기관 등에 개인정보 침해 등에 대한 손해배상 등을 청구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통신자료 제공 요청·취득 행위가 아닌 법 조항이 위헌인 데다 그 이유도 통지 절차가 미비하다는 것”이라며 “다만 헌재 판결과 무관하게 공수처의 기자 통신자료 조회의 경우 수사 목적이 맞는지, 통신사실 확인자료 취득에 관한 법원 허가를 받을 때 법원을 기망하지 않았는지 여부를 따져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처장이 지난 5월 18일 오전 경기도 과천 공수처로 출근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수사 보안 및 편의를 이유로 그간 수사 기관이 행했던 광범위한 정보 수집 관행에는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기통신사업자가 검찰·경찰·공수처·국가정보원 등에 제공한 통신자료 건수는 전화번호 수 기준으로 504만456건에 이른다. 그간 수사기관들은 수사 보안 등을 이유로 사후 통지 절차 마련에 반대해왔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수사가 진행됐을 때 수사 대상이 특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향후 수사 기관들이 헌재 결정을 어떻게 수용하고, 제도화할지 고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공수처는 헌재 결정 직후 입장문을 내고 “지난 4월 1일부터 무분별한 통신자료(가입자 정보) 조회를 차단하기 위해 통신자료조회심사관에 의한 사전·사후 통제, 통신자료 조회 점검 지침(예규) 운영 등 방안을 시행 중”이라며 “국회가 해당 법 조항 개정을 추진할 경우 논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통신자료를 받는 과정에서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을 보호하는 동시에 수사상 목적도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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