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소년 고문한 경찰.. 비틀어진 손가락의 비극 [납북귀환어부 이야기]

변상철 2022. 7. 2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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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귀환어부 이야기] 강원도 고성군 아야진 마을의 김인섭씨

[변상철 기자]

 강원도 고성군 아야진의 큰마을에 있는 김인섭씨의 집. 그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홀로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 변상철
김인섭씨는 다른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과는 달리 납북되었던 강원도 고성군 아야진 마을에 그대로 살고 있다. 소위 '큰마을'이라고 불리는, 아야진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집에서 홀로 거주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인터뷰하기를 원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바람이 거센 바닷가 마을의 전형적인 얕은 지붕 건물이었다. 키가 크지 않은 나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천장이 낮은 집이었다. 가족 없이 홀로 거주하고 있는 그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인터뷰할 수 있는 자신의 집이 편하다고 했다.

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무전기였다. 동해안은 봄철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다. 속초나 고성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산불 발생 빈도가 높다. 그 때문에 지자체에서는 산림감시요원을 선발해 산불을 예방하고 있다. 김인섭씨는 산림감시요원으로 화재발생이나 산림보호와 관련해 담당 공무원과의 신속한 연락을 취하기 위해 무전기를 비치해 둔 것이다.
     
오래된 무전기라 배터리를 자주 충전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정보기관의 조사와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았던 피해자의 집에 검은 무전기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처럼 보였다. 인터뷰 도중 간간이 '지지직' 소리가 들렸고, 그때마다 대화를 중단하고 무전기에서 나오는 소리에 집중해야 했다. 잠시였지만 몇 초간의 긴장감은 김인섭씨가 늘 겪고 있는 긴장감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졌다.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야진 마을에서 바라본 동해
ⓒ 변상철
 
김인섭씨는 강원도 고성군 아야진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아야진에서 거주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토박이 중 한 사람이다. 김씨는 다른 납북귀환어부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일찍 배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마저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며 겨우 졸업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15살 때부터 배를 탔어요. 나이가 어리니 혼자 태워주지는 않았고, 아버지와 같이 태워줬어요. 승운호 탈 때가 17살이었어요. 승운호 타기 전에는 연안 근처에서 오징어 잡는 배들만 타곤 했죠. 승운호는 선장 이진형씨가 같은 마을에 사시던 분이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다행이랄까 납북되던 그날 아버지는 승운호가 아닌 다른 배에 타셨어요. 원래 승운호도 그전에는 연안바리(연안근처에서만 조업하는 것)만 했었는데 71년에 처음으로 울릉도까지 나가 오징어잡이 하다가 납북된 것이죠."

승운호도, 김인섭씨도 울릉도처럼 멀리까지 나가 조업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연안 조업만 하던 김씨는 먼 바다까지 나가 조업하다 보니 심하게 멀미를 했다고 한다. '창자에 있는 것은 전부 토했다'고 할 정도로 심한 멀미로 인해, 조업 중에도 멀미가 나면 선실에 누워 있다가 나아지면 다시 나와 조업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무슨 정신으로 작업했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멀미가 심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렇게 정신없이 밤새 조업을 하고 나서 귀항 길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안개가 좀 끼고 비가 왔던 것 같아. 내가 잠에서 깼을 때는 배가 멈춰있더라고. 선실에서 나와보니 배가 멈춰있더라고. 그리고 좀 지나서 보니 이북 배가 두 개가 왔었어. 하나는 승운호 근처로 다가왔고, 하나는 승운호 주위를 뱅뱅 돌고 있었어. 그러더니 따발총을 가진 사람이 한 명 우리 배로 올라오더라고. '남반부 동무 새끼들 배 버리고 우리 배로 옮겨 타라우' 하더라고. 그래서 안 탄다고 했더니 줄로 우리 배를 걸어서 끌고 북한으로 들어가더라고. 북한 배에 '김일성 수령'이라고 빨간 글씨로 붙여놨더라고. 총 보니까 따발총 들고 있더라고. 공포탄을 쏴대는데 무서웠지. 그때 내 나이가 17살이니까 발발 떨었지."

그렇게 끌려간 선원 일행은 13개월 동안 북한 휴양소에서 억류 생활을 해야 했다. 김인섭씨는 고향에 두고 온 5명의 여동생들 걱정에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고 한다. 북한에 있는 동안 그곳에 정착하라는 여러 차례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무조건 집에 갈 거라고 생각했어. 북한 사람들이 북한에 남아 있으라고도 했는데 나는 무조건 내려간다고 했어. 북한 지도원들이 '북한에 있으면 장가보내준다'고 해도 난 무조건 간다고 했지. 가족들이 다 남한에 있으니까 무조건 내려간다고 했지. 선장이나 기관장도 '우리는 낙오자 없이 무조건 다 넘어간다. 승운호는 다 넘어간다'고 매일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낙오되는 사람 없이 다 넘어왔어."

김인섭씨는 남한으로 귀환 후 다른 승운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외부와 일체 접촉 없이 속초회의실 2층에 수용되었다. 장판도 없는 시멘트 바닥에 며칠간 공동 수용되어 생활해야 했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역시 시청 건너편 어느 여인숙에서 조사받았다. 물론 조사과정에서 김씨 역시 구타, 전기고문, 물고문을 수차례 당했다.
 
"옛날 돌리는 전화기 있잖아요. 그 전화기로 전기고문도 했어. 손가락 열 개에 다 전기선을 연결해서 집게로 꽂고는 전화기를 돌리더라고. 그러니 기절을 하지. 전기고문은 두 번 당했어. 지령을 대라면서 고문을 하는데 뭔 지령을 대. 너는 무조건 지령을 받았다는 거예요. 한국에 지령받고 넘어왔다니 환장하겠는 거예요."

국방의 의무에서 배제
 
 1976년 작성된 납북귀환어부의 현역병 입대를 제한하라는 병무청의 지침 공문
ⓒ 변상철
나이가 어린 사람은 어려서 지령을 받고, 나이가 많은 선장이나 기관장은 간부니까 지령을 받았다며 고문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문을 받고, 만신창이가 되어 시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고문을 받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선원들도 모두 같은 고문을 받았다.

고문받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것만큼 괴롭고 무서운 것은 없었다. 곧 자신도 저렇게 고문을 받을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었다. 마치 단체 기합을 받을 때 눈을 감고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다른 동료의 체벌 소리를 들으며 기다릴 때의 공포감과 비슷했다고 한다.

그렇게 폭력적인 조사가 끝나고 속초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도 다른 형태의 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우리는 반공법으로 수감되었잖아. 그러니까 유치장에 같이 수감되어 있던 일반 깡패들(피의자) 그놈들이 우리더러 '간첩'이라면서 패는 거야. 그런데 경찰이 그걸 가만히 보면서도 제지를 하거나 말리질 않아. 그렇게 폭력을 행사해도 모른 척하는 거야. 그리고 작은 방에 수십 명이 들어가 있으니까 잠도 칼잠을 자야 하는 거야. 그럼 잠이 오나? 좀 삐딱하면 그 깡패 놈들이 발로 막 우리를 차는 거야. 그렇게 어렵게 유치장 생활을 했어.

또 그다음에 법원으로 가야 되잖아. 법원 재판을 하러 가면 포승줄 묶어서 굴비 엮듯이 다녔어. 참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야. 몇 개월 살다가 판사가 집행유예라고 판결해서 나왔는데 그 유치장에서만 한 두 세달 살았던 거 같아. 집행유예라고 판사가 하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나가라고 하니까 나왔지."

유치장에서의 차별과 폭력은 김인섭씨를 비롯한 납북귀환어부들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며 받아야 할 차별과 폭력의 시작이자 축소판이었다. 누울 곳도 없는 공간과 사회에서 다시 밀려나야 하는 삶. 그것이 납북귀환어부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처지 그대로였다. 어딜 가나 경찰이 늘 따라다녔다고 한다. 주로 밤에 집으로 찾아오는 경찰. 결국 그는 서울로 도피했다.
 
"나는 반공법 위반자라고 해서 군대를 못 갔어. 그래서 20살 되자마자 서울로 올라갔어. 영등포에서 넝마주이(헌 옷이나 헌 종이, 폐품 등을 주워 모으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직업인) 했어. 직장에 올바르게 들어가지를 못하니까 그런 거라도 하면서 먹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거기서도 경찰 3명이 따라다니더라고. 어디 경찰인지는 모르는데 거기도 감시를 하더라고. 넝마주이 하는데도 그런 곳까지 따라다니더라고. 그래서 5개월 정도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어."
     
납북귀환어부라는 이유로 군대에 가지 못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1974년 병무청 작성의 문서에 의하면, 1975년 이전 징병검사 수감자 중 현역병 입대대상자는 이를 모두 취소하고 전원 보충역에 편입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1976년도 징병검사 수감자는 징집 등급을 4급으로 정하고, 병적기록표 처분사항에 '귀환자'라고 표시토록 하였다. 이를 위해 각 시도 경찰국에서 파악하고 있는 납북귀환어부 명단을 입수하여 현역병으로 입대하는 일이 없도록 조처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과거 한국전쟁 전후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될 당시, 학살의 근거로 삼은 것이 보도연맹이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국민은 국민이 아니었다. 언제든 끌려갈 '적'으로 간주되었다. 납북귀환어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져야 할 국방의 의무에서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잠재적 위험 요소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은 헌법이 정한 국민의 권리에 대한 명백한 차별행위이다.

"오래된 일이라 모른 척하면 안 되죠"
 
 지난 7월 13일 춘천지법 앞에서 열린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인섭씨. 이날 김씨를 비롯해 30여 명의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은 폭우 속에서도 지연되는 재심 개시를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 변상철
 
그런 삶이 억울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김인섭씨는 잠시 침묵하더니 어쩌겠느냐고 대답했다. 어디 회사에 취직하려고 하면 호적을 떼서 제출해야 하는데 호적에 납북된 사실이 기재되어 있어서 취업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어렵게 늦게 결혼했는데 북한에 갔다 온 것 때문에 아내하고도 이혼을 했잖아요. 어렵게 여자를 만났기 때문에 결혼할 때 북한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못 했어. 그런데 40대 중반쯤 돼서 내가 북한에 다녀와서 (호적에) 빨간 줄이 있다는 걸 아내가 알게 된 거야. 못 산다면서 이혼을 하자고 해서 결국 이혼을 하게 됐지. 그 바람에 애들도 방황하고, 애들 취업도 어려워지고."

최근 김인섭씨를 비롯한 납북귀환어부피해자들은 지연되는 재심 진행에 항의하고자 재심을 신청한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폭우가 내리던 이날 김 씨를 비롯해 30여 명의 피해자들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회를 강행했다. 이날 김씨는 정부에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생각해봐요. 만약 요즘 선박이나 선원이 납북되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안보가 뚫렸다고 난리가 날 거 아니에요. 작년 강화도에서 사람 하나 실종된 것 가지고 이 정부가 이렇게 난리가 나던데, 그럼 우리 같이 납치되었다 돌아온 몇천 명 사람들은 더 억울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오래된 일이라서 모른 척하고 싶다고 하면 안 되죠."

고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아파 요즘도 병원에서 허리 통증 주사를 맞으며 생활한다는 그는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언뜻 보기에도 조금씩 비틀어진 그 손가락도 전기고문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비틀어진 김인섭씨의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10대의 어린 나이에 국가로부터 받은 야만적인 폭력으로 인해 흉하게 비틀어진 곳이 어디 저 손가락 뿐이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틀어진 그의 몸과 마음, 그리고 비틀어져 버린 지난 시간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의외로 답은 쉽지만 문제를 풀어야 할 정부의 노력 이행은 어려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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