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전 0-1, 역전 가능" 이재용·최태원 엑스포 등판한 이유
#1. 지난달 2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70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경쟁 프리젠테이션(PT)에서 나선 한덕수 국무총리는 2분여 동안 프랑스어로 연설했다. 영어에 능통한 한 총리가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소화하자 우리 측 인사들 사이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총리실 관계자는 “(한 총리가) 프랑스어 발음 하나하나 손수 교정하면서 준비했다”고 귀띔했다.
#2. 이날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각국 대사들을 만나 부산의 2030 엑스포 유치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최 회장은 유치위원회 관계자들에게 “주요 국가 대사 부인들이 생일도 파악해달라”고 했다. 진심이 통해야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2030년 부산에 세계박람회를 유치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총력전에 나섰다. 1993년 대전엑스포, 2012년 여수엑스포가 있었지만 모두 ‘인정 박람회’(Recognized Exhibition)였다. BIE가 관할하는 엑스포지만 규모와 위상 면에서 한 단계 아래다. 부산 유치를 추진 중인 박람회는 ‘등록 박람회(Registered Exhibition)다. 1851년 시작한 런던 만국박람회의 전통을 잇는 ‘진짜 엑스포’다.
정부와 부산시는 지난해 6월 BIE에 2030년 엑스포 유치를 공식 신청했다. 김영주 전 무역협회장을 유치위원장으로, 5대 그룹 총수가 부위원장을 맡는 민간 유치위원회도 결성했다. 이전까지 국가적 행사인 올림픽·월드컵 때 특정 기업이 ‘올인’ 하던 방식을 떠나 ‘거버넌스형 유치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산엑스포 유치는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형태였다.
윤석열 정부, 총력전 나서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상황이 달라졌다. 당초 가장 강력한 후보는 러시아 모스크바였다. 우크라이나는 오데사 유치를 희망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두 도시 모두 손을 들었다. 그 사이 ‘오일머니’를 무기로 전방위적 공세에 나선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가 급부상했다. 전통의 엑스포 강자 이탈리아 로마도 뛰어들었다.
정부와 민간 유치위원회에선 부산엑스포 유치에 다소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개최를 희망하긴 하지만, 모스크바가 워낙 강자였고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전면에 나선 사우디의 위세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유치위 관계자는 “그동안 동계올림픽을 여러 차례 도전했던 것처럼 이번에 안 되면 차기를 노리자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선 과정에서 당시 윤석열 후보가 “국운을 걸고 유치하자”며 군불을 지폈고, 러시아의 탈락까지 겹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전면에 나선 것도 힘이 됐다. 지난달 2차 PT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 정부와 재계는 ‘총력전’ 태세를 갖췄다. 지난 8일 한덕수 총리와 최태원 회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민·관 합동유치위원회’가 출범했다.
재계도 적극 호응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위촉직 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5대 그룹 수장이 모두 참여했다.
“대표 선수 바뀌었으니 역전 골 가능”
우태희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은 주요 도시의 유치 경쟁 상황에 대해 “전반전이 0대1로 뒤진 채 끝났지만, 감독이 바뀌었고 스트라이커를 투입했으니 후반 역전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엑스포 유치 지원 민간위원회 집행위원 겸 간사를 맡고 있다. 지금까지 객관적 판세는 ‘아직 뒤진 건 맞다’는 얘기다.
개인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올림픽·월드컵 개최지 투표와 달리 엑스포는 1개 회원국이 1표를 행사하는 방식이다. 170개 BIE 회원국 가운데 개발도상국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유치위 관계자는 “실제로 개최지 선정 투표에 대표단을 보내는 나라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며 “대개는 프랑스 주재 대표가 투표하는데 우스갯소리로 정부의 지침과 다르게 투표해도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회원국 정부가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해서 반드시 표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란 얘기다.
총리 직속 유치위원회 정홍곤 기획팀장은 “사우디가 외신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유럽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문화유산이 많은 이탈리아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며 “한국과 부산도 어필할 수 있는 첨단기술과 문화 경쟁력이 충분해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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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동원 부담” vs “기업은 우리의 힘”
유치위에 이름을 올린 기업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한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부터 정현호 부회장을 중심으로 유치지원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동원해 지원에 나섰다. 최태원 공동위원장의 SK그룹 역시 월드엑스포(WE) TF를 꾸려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현대차·LG·롯데·CJ그룹 등도 역량을 보태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일 ‘엑스포 유치’를 언급하면서 기업들의 반응엔 온도 차가 있다. 먼저 국제 행사에 총력전을 기울이는 게 국민 정서에 부합하느냐는 부정적 시각이 존재한다. 유치에 실패했을 때 ‘책임론’이 불거지거나 정부에 ‘선물’을 기대하는 것으로 비치는 걸 우려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다른 기업 활동에 보조만 맞추는 곳이 있는가 하면 앞장서는 곳도 있고 분위기가 제각각”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국가 이벤트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보여준 투지와 노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많다. 한 고위 경제관료 출신 인사는 “이재용 부회장이나 정의선 회장 등은 모두 선대가 국가 위상을 높이기 위해 헌신했던 걸 알고 있을 것”이라며 “재계가 엑스포 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도 이런 순수한 유전자(DNA)에서 비롯한 것으로 봐달라”고 했다.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 원장도 “이제 엑스포는 전구나 라디오가 처음 등장한 ‘만국박람회’라기보단 국가를 홍보하는 플랫폼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그저 정부가 주도하는 행사가 아니라 총성 없는 경제전쟁 시대의 중요한 행사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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