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평론가 유종호 "노인 젊은 세대 대화 안 되는 건 당연"

신준봉 2022. 7. 2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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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선생. 우리말의 변천을 살펴본 『사라지는 말들-말과 사회사』와 두 번째 시집 『충북선』을 최근 동시에 출간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낮 전기는 발전량이 부족해 밤에만 제한 송전하던 1950~60년대 병원 등 필수시설에 낮에도 공급되던 전기를 뜻한다. 요즘 사람들은 알 길이 없는 표현이다. 겨울철 썰매나 비속어인 등신은 모두 한자에서 왔다. 각각 설마(雪馬), 돌·쇠·흙으로 만든 사람 형상을 뜻하는 등신(等神)이 원어다. 진검승부는 일본어 표현. 일본 검도에서 죽도나 목도가 아닌 진짜 칼로 벌이는 승부를 뜻한다.
사실상 사라졌거나 무심코 사용하는 말들인데,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87) 선생이 최근 펴낸 『사라지는 말들-말과 사회사』(현대문학)에서 소개했다. 모두 207개를 표제어로 다룬 책에서 선생은 사라지는 말들을 외국어에 빗댔다. 과거는 일종의 외국, 과거의 말은 외국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의 일상어도 서로에게 외국어나 마찬가지다.

『사라지는 말들-말과 사회사』


외국어 같은 옛말들을 되살리자는 얘기가 아니다. 변하는 것이 언어의 특성이고 세월 앞에 장사 없듯 변화하는 시속(時俗) 앞에 성길사한(成吉思汗·칭기즈 칸)이나 나파륜(拿破崙·나폴레옹) 같은 표현은 발붙일 자리가 없다는 얘기다. 다만 살릴 수 있다면 살리는 게 좋다. 옛말과 그에 얽힌 정서가 대체불가능인 경우도 있다. 치매보다 상대적으로 덜 쓰이는 망령이라는 단어를 활용한 '철들자 망령' 같은 표현이 그런 사례다. 가장 간결한 인간론, 가장 슬픈 인생론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이 특히 유념해야 할 표현이라고 꼬집었다.
20일 선생을 전화 인터뷰했다. 정확한 미문(美文)을 자랑하던 당대의 평론가는 이제는 동년배 최강 기억력으로 공인해야 할 것 같다. 책에서나 말에서나 막힘이 없었다.

유종호 선생은 사라지는 옛말을 살펴보면 지나간 우리 사회 풍경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기억력의 비결이 있나. 수십 년 전 풍경을 책에서 생생히 되살렸다.
"담배는 30대 중반에 끊었다. 술은 평생 안 마셨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어려서부터 총기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2, 3년 전부터 고유명사가 즉각 떠오르지 않아 한참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평론가인 선생은 생애 두 번째 시집 『충북선』(서정시학)을 이번에 함께 출간했다. 어휘구사력 쇠퇴 방지가 시를 쓰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자료조사량도 만만찮게 느껴진다.
"사라지는 말들은 사회적 수요가 없어져 용도 폐기된 것들이다. 항상 변하는 언어의 기본 속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옛말이니까 지키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가령 정신분석학에서 '인세스트(incest)'는 근친상간이라고 번역한다. 이 번역이 널리 퍼져 학술용어로 정착돼 있는데 우리 옛말에 상피(相避)가 같은 뜻이라고 쓰자고 하는 것은 복고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우리 어사(語詞)의 역사적 함의를 잘 이해하는 것은 우리 말은 물론 우리 역사 이해에도 도움이 된다. 우리 역사는 너무 정치사로만 기울어져 있다. 오히려 사람들이 세끼 밥을 다 먹었는지를 살피는 사회사가 중요하다. 사라진 말 속에서 우리의 옛날 사회사를 복원시키자는 생각이었다."

유종호 선생의 두 번째 시집 『충북선』. 표제작 '충북선'이 여운이 오래 남는다.


선생은 말은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이라고 했다. 같은 단어라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뜻이 미묘하게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세대 차는 더 크다. 가령 노망이나 망령은 노인들이 흔히 겪는 정신상의 일탈, 그에 비해 치매는 구제할 길 없는 질병을 뜻한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 치매가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표현이라고 느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일상어가 다르면 세대 갈등도 생길 수 있지 않나.
"갈등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너무 나간 얘기고, 공감대가 사라지는 거다."
-공감대를 넓히려면.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노인은 미래가 없는 세대다. 미래가 없는 사람이 미래가 많은 사람과 대화가 잘 안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유종호 선생은 정든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무조건 되살려야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책에서 속담이 풍부한 문학 자산일 수 있는데 우리의 경우 제대로 활용되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아테네의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라는 작품에서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고 썼다. 이 말은 소포클레스가 발명한 게 아니다. 원래 그리스 속담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사용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우리에게도 좋은 속담이 많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속담은 소외감을 기막히게 표현했다. 철들자 망령 같은 속담은 잘만 활용하면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이 너무 한문으로 글을 쓰다 보니 보통 사람들의 지혜나 상식이 문학 속에 흡수되지 않았다."
-국내 국어사전의 문제도 여러 차례 지적했다.
"우리 국어사전들이 한자 뜻풀이에만 치중하다 보니 언어가 실제 사용되는 현장의 감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용례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 예문이 없으면 사전은 별 효과가 없다."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정치권을 질타하는 대목도 적지 않은데.
"책은 월간 현대문학 연재 글을 묶은 것인데 연재 기간(2020~2021)을 고려하면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정치의 속성이 여당하고 야당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 정치 현실은 사교 광신도들이 자기 교주들을 모시고 서로 싸우는 형국이라고 본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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