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인이 중심에 있었던 언양만세운동
[이병길 기자]
▲ 안태로와 1930 학성공원에 소풍온 울산유치원생들 -안태로는 울산지역 천도교인으로 평생 야학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
ⓒ 울산교육청 |
1919년 4월 2일 언양만세운동의 중심에 언양지역의 천도교인이 있었다. 1921년 5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임명된 언양 인근지역 포덕 담당 전도원(傳導員)은 다음과 같다. 상북면(상남하북)면은 이규천ㆍ이규장ㆍ이규화ㆍ김교경ㆍ김시곤ㆍ정석룡ㆍ한영석ㆍ이종○ 등 7명이 있었고 중남(삼남)면과 언양면은 유치두ㆍ신태수ㆍ곽해진ㆍ김기오ㆍ오○○ㆍ곽해천ㆍ윤기호ㆍ유철순 등 8명, 삼동면과 반송, 반천은 변상우ㆍ신임룡ㆍ서익조ㆍ침우식ㆍ김○로ㆍ신은호ㆍ박장하ㆍ선성규 등 8명, 그리고 두서 두동면에는 황선운ㆍ차병기ㆍ최○○ 등 3명으로 총 26명이 있었다.
만세운동의 여파로 중심인물들은 도피를 하거나 수감되어 한동안 언양지역의 천도교 세력은 위축되었다. 하지만 수감되지 않거나 출옥 이후 다시 천도교 인물들은 활동의 기지개를 켰다. 상남면 거리마을 천도교회관에 양정학원을 만들어 인재 육성에 나섰다.
언양지역의 천도교는 포교사 임명수가 1910년경 언양면 송대리의 최해규(1898~1934)를 포교하고, 최해규는 김교경을, 김교경은 상남면 길천리의 이규천(1876~1962)과 중남면 신화리의 곽해진(1888년생)을, 곽해진은 중남면 교동리 유철순(1890년생)을 포교하면서 천도교가 널리 확장되었다. 김교경(金敎慶, 1871~1933)은 하북면[현 상북면] 산전리 출생으로 서당 훈장을 하다가 1911년 천도교 전도사로 임명되었고 초대 교구장인 최해규의 뒤를 이어 1913년 5월 10일 천도교언양교구장으로 선출되었다.
9월에 상남면 거리에 교인 이규로의 땅을 기증받아 교구건물을 세웠다. 1914년 언양과 울산이 통합되자 7월 울산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915년 6월 초 언양 수남마을 작천정 가는 길 큰 바위에 김교경은 교인 김영걸과 더불어 석수 함석헌에게 '人乃天(인내천)'을 새기게 했다.
언양만세운동
1919년 고종 인산때 김교경은 경성(서울)에 머물면서 독립신문 등을 필사해 언양으로 보내 만세운동의 계기를 만들었다. 천도교 교인인 최해규, 이규장, 이규천, 곽해진, 유철순 등이 유림대표 이무종(李武鍾), 이규인(李圭寅), 김향수 등과 협의해 거사를 결의하고, 거사일자는 4월 2일 언양장날로 정하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상남면 천도 교회에서 밤을 새서 등사하며 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 이틀을 앞두고 최해규, 최해식 형제와 곽해진, 유철순 등이 예비 검속(檢束)되었다. 이 소문이 읍내에 전파되자 사전에 발각된 것이 염려돼 예정한 날의 거사를 주저하였지만, 이무종,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 이규경 등은 4 월 1일 밤 상남면 길천리 이규인 소유의 빈집에 모여 밤을 새며 많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언양 인근의 통도사 신평장터에서 3월 13일, 양산시장에서 4월 1일 이미 만세운동이 벌어져 언양에도 만세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어 있었다. 4월 2일 언양 남부리(南部里) 장터에는 인근의 상남·중남·삼동·두동·두서의 각 면과 인근 양산 하북면 등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제경찰은 만일을 경계하여 읍내 곳곳에 수비를 삼엄하게 하면서 수남부락의 정병한(鄭炳漢)을 주재소로 체포해 갔다. 이때 김성진 노인이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선창하였고 이규인이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선봉기를 높이 쳐들자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해 만세를 불렀다.
천도교인들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자 이를 받아든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언양읍성쪽으로 이동하였다. 2000여 명이었다. 시위대열이 행진을 계속하자 앞선 주동자들을 체포해 언양주재소로 연행했다. 분노한 시위 군중들이 체포된 이들을 구출하려고 주재소로 쇄도해갔다. 일본 군경은 언양읍성 영화루에서 군중에게 실탄사격을 하였고,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이때 일본 군경의 총격이 빗발치면서 손입분(孫粒粉)여사가 현장에서 순국했고, 곽해진의 모친 길천댁을 비롯해 남녀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통도사 신평만세운동이 불교 승려가 중심이었다면, 언양만세운동은 천도교인이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만세운동에 관련된 48명을 검거하여 재판에 넘겼다. 대부분 6개월 에서 1년의 징역 선고를 받아 부산, 대구형무소에서 징역을 살았다.
언양 천도교인들의 활동
만세운동 당시 김교경은 피검을 피하고 1922년 이규호ㆍ성충갑ㆍ김찬희 ㆍ김석한ㆍ이규천 등 지역유지와 함께 상남면 거리에 양정학원을 건립해 지역 인재양성에 힘을 썼다. 그는 서울에 올라가 천교도 혁신파인 천도교연합회 활동을 1920년대 초반부터 하였고, 1921년 10월 천도교 울산 의정원으로 선출되었고, 천도교연합회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1924년 5월 상남면 교회에서 김교경의 사회로 교인대회가 열렸다. 이때 연합회의 결의사항을 통과시켰다. 이 당시 천도교연합회는 중앙교단과 분리된 때였다. 언양 천도교회는 중앙교단보다 천도교연합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교경의 영향일 수 있지만, 만세운동의 경험 결과일 수도 있다. 천도교 연합회는 민족주의적 경향보다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유철순은 삼남면 농민조합장, 이규천은 해방 후 울산군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언양지역 천도교인들은 천도교연합회울산지부로 활동하며 회비를 납부하고, 총회에 참석하였다. 김교경이 1933년 2월 7일 사망 당시 그의 직책은 천도교연합회 간사였다.
언양지역에는 천도교와 직접 관련한 청년, 소년운동 단체는 결성되지 않았지만 종교적 활동을 하며 사회참여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언양청년회가 결성되어 지역유지들의 친목과 지역사회 발전을 도모하는 목적에서 창설되었다. 초창기 활동은 미흡했지만, 만세운동 관련자가 석방되고, 일본에 유학을 갔던 신학업 귀국하면서 언양 청년운동은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23년 천교도인들은 조선일보 언양지국을 경영하면서 신문화운동 보급에 앞장섰다. 지국장 곽해진, 총무 김기오로 기자는 김기오, 김원룡, 김동수였고 신문보급은 오영수가 하였다.
언양 안에서 1924년 3월 29일 39명의 발기로 '언양 무산자 동맹(彦陽無産者同盟會)'이 작천정에서 결성됐다. "무산계급의 의식에서 발생한 절실(切實)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자본가의 철쇄(鐵鎖)에 신음하는 동포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강령은 "1. 무산계급의 의식을 촉진할 신사상 연구 및 보급함을 목적함 2. 무산대중해방운동에 노력함 3. 무산대중을 본위로 한 신사회 건설을 기도함"으로 하였다. 사무 집행은 서무부, 재무부, 교육부, 조사부 4개 부서를 설차하여 노농(勞農)운동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 하였다. 무산자동맹원에 대한 보도는 없기에 그 구성원을 알 수 없지만, 언양의 신학업을 비롯한 언양청년회원들로 여겨진다. 언양지역의 각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한 인물이기에 자연스럽게 언양지역은 사회주의적 무산계급해방을 목표로하는 운동이 진행되었다. 무산자동맹의 결성은 언양의 안과 밖 지역의 사회에 관심이 많은 청년과 소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언양청년회와 무산자동맹은 '농민의 서광(曙光)', '걸인의 재판' 등의 소인극을 했는데, 이는 무산자의 환경과 노농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여 명단은 확인되지 않지만 김기오, 신영업, 신학업 등 언양청년회 활동가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 3명은 식민지 조선의 정세변화에 따라 언양청년회, 언양소년회, 언양소년소녀연맹, 언양청년동맹, 신간회 울산지회 언양분회, 언양농민조합, 언양야학회 등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신학업은 2ㆍ8독립선언운동, 상해임정 조사원 활동,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잡지 발행 경험 등을 놓고 볼 때 언양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볼 수 있다. 훗날 대한교과서주식회사를 만들고 현대문학을 창간한 천교도인 김기오는 언양 사회・청년운동의 대부였다. 김기오와 신영업은 1920년대 중후반 양산청년회, 신간회 활동을 하였고, 1930년대 신영업과 신학업은 양산농민운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24년 4월 하순경 상남면, 하북면 청년이 중심이 된 회원 40여 명이 단합하여 <시대청년회>를 결성하였다. 강령은 "의식개혁, 계급타파, 노동본위"로 정했다. 궁벽한 농촌의 계발에 많은 이익을 위해 다방면의 사업을 위해 집행위원으로 이규경, 강영상, 정일수, 이무종, 정장수, 정재홍, 김대식, 김택선, 이재호, 이규장 등 10명을 선정하였다. 이규경, 이무종, 이규장은 천도교인이었다. 그들의 강령은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이들은 아마 <언양무산자동맹회(彦陽無産者同盟會)>의 영향을 받은 천도교인이 주축으로 만든 조직으로 짐작된다.
언양 안에서 1925년 5월 3일 언양유지 10여 명이 모여 <사시회>를 결성하였다. 강령은 "지식향상, 생활개선"을 강조하고 매년 봄과 가을 2회 모임을 하기로 하고, 집행위원으로 유철순을 선출하였다. 사시회(四時會)는 상남, 하북, 중남, 언양 4개 지역의 시대청년회의 연합 모임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 회원 명단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언양지역의 실력양성을 강조하는 청년들이 서로 교류하면 협력하기 위해 만든 모임인 듯하다.
1926년 1월 상남면 길천리에서 노동합성회 간판과 노동야학회 문을 파손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회주의적 성향의 운동에 반감을 품은 지역인의 소행이었다. 1월 17일 오후 8시 경찰의 경계를 받으며 상남시대청년회, 상하북노동야학연합회, 노농합성회 3개 단체의 반동분자 소탕연설이 있었다. 울산군 청년연맹 대표 조형진, 동면구락부 박학규, 병영노동동지회 강철 등이 참석하였다. 단체와 참석자를 보면 사회주의 경향이 강했다. 시대청년회는 1927년 4월 25일 오후 2시에 제10회 집행위원회를 열어 메이데이 기념, 하북소작 쟁의, 청년연맹 합동 촉성(促成)을 결의하였다.
1926년 3월 4일 상남면 길천리 노농합성회 제1회 장기총회가 열렸다. 모임 명칭을 '북남농민조합'으로 바꾸고, 규약과 강령을 수정하고, 집행위원을 선출하였다. 김활, 김진경, 김대식, 최세권, 강영상, 정태균, 성헌장, 서해종, 정필락, 이태산, 이동기, 이규경이었다. 그리고 군내에 산재한 농민단체와 상의하여 군연맹을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언양지역 천도교 청년운동가들은 민족해방운동에서 계급해방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이 일찍이 있었다. 이들은 김교경의 영향을 받아 천도교 신파의 인간해방보다는 계급해방을 목표로 하는 노선과 운동을 하였다. 천도교인으로 기미년 만세운동의 주역인 이규장과 이무종은 상남면 길천리 양정학원과 야학운동 중심으로, 유철순과 곽해진은 삼남면을 중심으로, 이규경은 상남면에서 울산지역까지 활동반경을 넓혔다. 직접 만세운동의 주역은 아니었던 김기오는 언양청년회를 기반으로 언양소년회 단장(1922)과 울산기자단 창립 회장(1926)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7년부터는 양산지역에서 활동했다.
천도교소년회가 전국적으로 1920년대 말경에 150여 개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관서지방(97개), 관북지방(28개) 중심이었고 영남지방은 8개가 있었다. 울산에는 1921년 9월 천도교소년회가 있었지만, 언양지역에는 없었다. 이는 언양지역의 천교도인이 1919년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구속되어 교세가 약화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울산지역 천도교소년회 운동
▲ 언양독립운동사적비 언양만세운동은 언양시장 입구인 남천교에서 언양읍성 영화루 사이에서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주역은 언양사람이었지만 준비는 상북면 천도교인들이었다. |
ⓒ 이병길 |
울산지역의 천도교는 만세운동 이후에 포교가 되었다. 1920년대 초까지 울산 읍내일부와 하상면 일부지역에 천도교 포교가 이루어졌다. 1921년 5월 울산면과 하상면 포덕 담당 전도원(傳導員)은 백남철, 허준해, 박지영, 김동욱이었다. 울산지역 천도교인들은 언양지역이 천도교연합회의 영향을 받은 것과 달리 중앙교단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언양이 만세운동의 여파로 구속과 도피로 어수선하고 교회가 제역할을 하지 못할 때, 울산읍과 하상면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1921년 4월 13일 울산천도교청년회(천교도청년회울산지회) 제1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것은 이전에 청년회가 창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업경과보고, 회계보고가 있은 후 임원이 개선되었다. 회장 허준해(許俊海), 간무원(幹務員) 차덕줄(車德茁) 장진희(張璡喜), 간의원(幹議員) 김동욱(金東旭) 박지양(朴志陽), 지육부장(智育部長) 박지양이 임원이 되었다.
허준해는 안태로와 함께 천도교에서 운영한 동화의숙과 울산여자야학 교사로 활동하고, 1926년 1월 울산우차조합(蔚山牛車組合) 동맹파업 집행위원, 동아일보 울산지국 기자를 지냈고, 1934년 울산어채위탁판매조합(蔚山魚菜委託販賣組合)의 부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울산교구 포교일지 <연원록(淵源錄)>에 따르면, 전도사 김문성 박지석 백봉기 등 3인이 울산면 옥교동과 북정동에 거주하는 김소룡 차덕출 박금화 가족을 포교하였다고 한다. 차덕출(車德出)이 바로 차덕줄(車德茁)과 동일인물인 듯하다.
그는 1922년 울산청년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고, 1925년 울산의 고등교육기관인 통도사울산포교당에서 운영했던 '고등강습원'을 울산청년회관에서 수업할 때 전임강사였다. 장진희는 1932년 동아일보 언양분국장 대리를 했다. 김동욱은 1921년 동아이로 울산 분국장, 1922년 울산청년회 평의원, 1924년 울산노동동우회 위원, 1926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안태로와 함께 천도교당을 신축하였다.
울산천도교소년회는 1921년 9월 11일 울산불교소년회, 울산기독교소년회와 함께 울산공보 교정에서 축구경기를 개최하였다. 울산지역의 종교단체에서는 일찍이 소년회를 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후 천도교소년회의 활동은 신문에 보도되지 않다가 1924년부터 다시 보도되었다.
1924년 10월 17일 오후 8시 울산청년회관에서 울산천도교소년단 소년소녀의 가극대회를 개최하여 지역유지의 동점금 30원 이상을 모금하였다. 울산천도교소년단 소년극단은 12월 27일 언양에 도착하여 언양지역 단체의 후원으로 저녁 8시경부터 공연을 하였다. 사회극 "청년의 개심(改心)"과 종교극 "신생(新生)의 날(日)"을 공연하였다. 28일에는 상남면 거리의 천도교회에 수백명이 관람하였다. 사회극과 종교극 공연은 계몽과 함께 천도교 포교활동을 목적으로 한 공연임을 알 수 있다.
1921년 9월 울산천도교회에 노동계급을 위한 노동야학회가 설립되었다. 조선어, 일본어, 산술, 한문을 40여 명에게 가르쳤다. 1924년에는 여자야학을 개설했고, 1925년에는 주·야간으로 운영하는 동화의숙으로 발전했다. 천도교 야학은 1930년까지 운영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인가를 받지 못해 폐쇄되었다. 울산지역 천도교소년운동은 안태로 선생의 야학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야학은 결국 무산소년을 계몽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언론과 지역사회에서는 안태로를 '무산아동교육기관에 빛나는 존재'이자 '내고장의 문화은인'이라고 평가하였다. 천도교가 강조하는 인간존중 사상의 실현을 안태로는 교육을 통해 이루고자 하였다. 그는 계몽적이고 문맹퇴치적인 민족주의 교육의 한계 내에 머물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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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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