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도 애플도 투자 스톱 긴축 시작
고물가·고환율(원화가치 하락)·고금리 등 ‘3고(高) 악재’를 만나면서 일부 국내외 기업의 투자 시계가 멈추고 있다. 세계 경기침체(Recession)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 경영이 현실화하고 있다.
19일 재계와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달 29일 이사회를 열고 충북 청주공장 증설 결정 보류를 결정했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당초 이 안건을 의결하려 했지만 논의 끝에 보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SK하이닉스는 4조3000억원을 투자해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내에 43만3000㎡ 부지에 신규 반도체 공장을 증설할 계획이었지만 이사회에서 “과연 증설이 필요한지 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SK하이닉스의 투자 연기 이유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 침체를 꼽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국 경기 둔화 등에 따른 정보기술(IT) 수요 감소로 반도체 가격 하락세가 예상된다. 이와 더불어 고환율·고금리에 따른 기업 투자 비용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향후 투자 일정에 대해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4일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작년에 세웠던 투자 계획은 당연히 바뀔 가능성이 존재한다. 원재료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 계획이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한 만큼 투자 축소 기조가 그룹 계열사로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앞서 LG에너지솔루션 역시 미국 배터리 공장 투자 건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조7000억원을 투자해 애리조나주에 원통형 배터리 공장 건설을 지어 2024년 제품을 양산할 계획이었지만 최근 경제 환경 악화에 따른 투자비 급등을 이유로 재검토에 들어갔다.
긴축 경영 분위기는 특정 업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WSJ “미국 0.7% 성장 전망” … 아마존·TSMC까지 몸 사린다
이상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정책팀장은 “필수 소비재를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비슷할 것”이라며 “물가가 급등해 수출 수요가 준 데다 원재료비 압박에 제품 가격을 올리면 소비 수요가 줄어드니 투자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새 정부 출범 이후 금융 비용까지 올라 예상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10대 그룹이 지난 5월 발표한 향후 5년간 1000조원대 투자에 대해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깊은 고민이 엿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고환율·고물가로 100원 들어갈 돈이 130원으로 오른 데다 이를 충당할 수 있는 수요도 불안정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그룹 관계자 역시 “정말 어렵긴 어렵다”며 “특히 원자재 가격, 물류비 인상과 소비 심리 위축에 큰 영향을 받는데 하반기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여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그룹은 올해는 투자 계획을 유지하되 연말께 글로벌 정세를 지켜보면서 방향을 정할 계획이다. 많은 대기업이 본격적 투자 시점을 내년 이후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글로벌 기업 역시 긴축 경영에 돌입했다. 18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애플은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비해 내년 일부 사업부문의 연구개발(R&D)과 채용 예산을 낮춰 잡기로 했다. 또 매년 5∼10%가량 인원을 늘려온 것과 달리 내년에는 일부 부서의 인원을 늘리지 않기로 했다.
앞서 알파벳·아마존·메타 등 대형 기술기업(빅테크)도 채용과 지출 축소 계획을 발표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테슬라는 감원에 들어갔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 3위인 미국 마이크론은 지난달 말 실적 발표 때 오는 9월부터 설비 구매 등 시설 투자액을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 업체인 대만 TSMC는 시설 투자액을 당초 예상했던 400억∼440억 달러(약 52조4000억~57조7000억원)에서 400억 달러로 줄였다.
기업의 투자·채용 축소에 투자 시장도 들썩였다. 최근 회복세를 보였던 SK하이닉스 주가는 이날 전날보다 0.99%(1000원) 하락한 10만원으로 마감했다. 애플 주가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2.06% 급락해 147.07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62명의 경제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향후 12개월 안에 경기 침체가 올 확률’에 대한 답변의 평균치가 49%로 집계됐다. 또 이들은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이 0.7%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WSJ는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공급망 차질 등 악재가 겹친 상황을 원인으로 분석했다.
이상호 팀장은 “물가가 잡히면 모르겠지만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상승)이 발생하면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래 갈 수 있다”며 “정부가 추진하는 법인세 감면, 투자세액 공제 등이 실제 적용돼야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말했다.
최은경 기자 choi.eunk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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