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가 독립운동 했던 집에 남겨진 이상한 꽃담 [꽃담여행]

김정봉 2022. 7. 1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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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여행②] 충북 괴산 홍범식 고가, '벽초 홍명희 생가'의 꽃담

[김정봉 기자]

중부내륙고속도로 양평방향 괴산휴게소는 꽃담을 주제로 휴게소를 꾸며놓았다. 서울 복판의 궁궐도 아니고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 괴산을 꽃담 고을이라며 괴산 홍범식 고가와 김항묵 고택의 꽃담을 소개하고 있다. 마침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에 수록되어 있는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있는 곳이어서 꽃담 여행의 첫발을 괴산에서 떼었다.
 
▲ 고산과 괴강 들판에 우뚝 솟은 고산 아래 괴강이 휘돌아 흐르는 이곳은 괴산이 자랑하는 경승지다. 여기서 1km쯤 떨어진 제월리 옛집에 잠시 머문 벽초는 괴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산정(산꼭대기 솔숲 안)에 올라 바람을 쐬었다고 한다.
ⓒ 김정봉
 
괴산은 충북에서 제일 넓은 땅을 갖고 있으나 땅은 거의 산들의 차지다. 사방 산들이 촘촘하여 <택리지>에서도 '산협(山峽)은 좁으나 시내와 산이 맑고 깨끗하여 땅을 갈고 거둬들이는 즐거움이 있다' 했다. 좁다란 골짜기 물을 받아 흐르는 강이 괴강이다. 멀리 속리산에서 시작한 괴강은 괴산읍 제월리에 이르러 잔뿌리 없이 우뚝 선 고산을 크게 휘돌아나간다.
산수가 어우러진 고산 주변은 변방 괴산이 그나마 내세워 자랑하는 경승지다. 먼 옛날 충청도 관찰사 유근(1549-1627)이 한눈에 알아보고 제월대 곁 고산 꼭대기에 1596년 만송정(현 고산정) 정자를 세우고 퇴임 후에는 아예 이곳에 눌러 앉아 은거하였다.
  
▲ 벽초 홍명희문학비 1998년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가 세웠다. 괴산지역 보훈단체의 반발로 비문이 철거됐다가 2000년에 일부 문구가 수정된 뒤 비문이 다시 부착되었다. 수정된 문구 중 하나는 ‘평생 민족을 위해 헌신한 벽초’에서 ‘평생’ 자를 뺀 것이다.
ⓒ 김정봉
 
소설 <임꺽정>의 연으로 세워진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그 곁에 있다. 비문은 신영복 선생이 썼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벽초가 잠시 머문 적이 있어 얼핏 보면 벽초를 제대로 대접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다르다. 주차장에 밀려 한구석에 더부살이하듯 서있다. 오늘도 어제처럼 문학비는 제월대 주차장 가장자리에서 외로이 따가운 햇발을 받아내고 있다.

'반평생'만 인정받은 괴산의 인물,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제월대 광장에 세워졌으나 정작 벽초가 태어난 곳은 괴산읍 동부리 동진천가에 있는 홍범식 고택이다. 아버지 일완 홍범식(1871-1910)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0년 8월 29일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충남 금산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일완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시신을 괴산으로 옮길 때 금산 백성 100여 명이 동행했다 한다.
  
▲ 홍범식고가(벽초 홍명희 생가)  고가는 지붕에서 발견된 기와의 명문에 의하면 173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888년 벽초가 태어난 집이다.
ⓒ 김정봉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 (홍범식이 아들에게 남긴 유서 중 일부)

이 유언은 벽초를 평생 따라다녔다. 홍명희(1888-1968), 이광수, 최남선은 조선 신문학의 삼재라 불린다. 이 중 이광수, 최남선은 선봉에서 친일의 나팔을 불었고 벽초는 은둔할지언정 변절하지 않았다. 변절은 좌절과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다. 아버지의 유훈을 가슴에 새긴 홍명희는 두려움을 떨치고 해방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다졌다. 곧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이다."
  
▲ 금산군수 시절의 홍범식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한 뒤 이듬해 국치를 당한 날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 괴산군청
 
1919년 3월 19일 괴산만세운동, 1927년 2월 신간회의 창립을 주도하는 항일운동에 매진, 몇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48년 4월10일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간 벽초는 북한에 눌러 앉아 부수상까지 지냈다. 이 이력이 항상 문제가 되었다. '평생 민족을 위해' 대신 '평생' 자를 빼고 그냥 '민족을 위해' 헌신한 벽초로 평가되는 바람에 인생에 분절이 생겼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 곁을 떠난 그를 우리 곁으로 데려온 것은 소설 <임꺽정>이다. 배타적 민족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엇갈리는데 임꺽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문학비는 그렇게 세워진 것이다.
  
▲ 1920년대 홍명희  1920년대 홍명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사장을 거쳐 1927년 신간회 창립에 관여하고 1928년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충북편에서 재촬영)
ⓒ 답사여행의 길잡이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을 들었다. 그 중 임꺽정은 벽초 홍명희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신영복 선생은 <임꺽정>을 '최초의 대하소설이면서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천민을 소설의 중앙에 앉혀 놓은 작품이다'고 평가하며 이것만으로 혁명적인 것이라 하였다.
벽초는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를 민중으로 여기고 천민 임꺽정을 과감하게 대하소설의 주인공으로 채택, 민중의 영웅으로 등장시켰다. 양반에서 상놈, 백정의 말에 이르기까지 조선다운 문장과 문체, 인물, 이름, 풍속까지 철저하게 조선의 것으로 만들어 민중을 구원하고 민족해방의 의지를 표명했다. 문학비에 벽초가 직접 밝힌 말을 신영복 글씨체로 적어놓았다.
  
▲ 벽초 홍명희문학비 세부 신영복선생의 글씨다. <임꺽정>은 철저하게 조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며 벽초가 밝힌 말을 그대로 새겨 놓았다.
ⓒ 김정봉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홍범식 고가(벽초 홍명희 생가)

벽초의 인생에 <임꺽정>이 없었다면 괴산에는 벽초 홍명희의 '벽'자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벽초가 태어난 홍범식고가에는 아직 벽초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문화재 안내문에도 '괴산 홍범식 고가'라 되어 있고 국가보훈처지정 현충 시설 안내문에도 홍범식 고택으로 적혀있다. 추모비도 아버지 홍범식의 차지다.

1919년 3월 홍범식 고가 사랑채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벽초가 괴산사람들과 도모하여 괴산만세운동을 준비했던 곳이다. 홍명희와 삼촌 홍용식과 홍태식, 동생 홍성희 그리고 서부리에 살던 이재성의 주도 아래 독립선언서 3백매를 인쇄하였다. 3월 19일 장날을 기해 코앞에 있는 동진천 너머 괴산 장터에서 충북지역 최초의 만세시위를 단행했다.
  
▲ 홍범식고가 사랑채 1919년 사랑채는 괴산만세운동을 준비했던 곳이다. 사랑채 오른쪽에 딸려 있는 샛문 너머에 안채가 나란히 있다. 대문채-사랑채-안채의 수직구조를 벗어나 사랑채와 안채가 수평으로 배치되었다. 이는 중부지방의 살림집 특징이다.
ⓒ 김정봉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은 언제 올지 모른 채 아버지의 유훈을 새기며 몸부터 움직여 한 결연한 행동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짐을 하나 내려놓는다는 후련함과 일경에 잡혀 투옥될 거라는 두려움과 긴장감, 일을 무사히 성공시켜야 한다는 결연함이 교차하였다. 아버지는 자결하고 벽초가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된 대가는 컸다.

가세는 기울어 집이 넘어가는 곡절을 겪었다. 석방 후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제월리 365번지에 잠시 머문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 광채만 남아 있던 고가는 2002년 괴산군이 매입하여 복원하였다. 새로 세운 대문채와 곡간은 아직 기와에 날이 서있다. 나란한 사랑채와 안채는 담을 쌓아 엄격히 구분하고 두 공간은 후원샛문으로 드나들게 했다.

변방에 피어난 꽃담

사랑채 오른쪽 쪽문에서 사랑채 후원에 이르는 후미지고 긴 공간을 지나야 비로소 안채후원으로 들어가는 샛문에 닿는다. 이 공간은 사랑채와 안채의 이질적 공간을 이어주는 전이 공간으로 여기에 꽃담이 있다. 사랑채 끝 방을 싸고 있는 화방벽이다. 사랑채에 딸린 꽃담이지만 남성보다는 여성을 위한 담이다.
  
▲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전이공간  안채와 사랑채의 두 이질적 공간을 잇는 전이공간이다. 이곳에 꽃담이 있다. 길고 후미진 공간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공간이어서 예술성을 발휘하여 꾸며 놓았다.
ⓒ 김정봉
 
아직 세월에 삭지 않아 푸석한 질감은 없다. 주변부, 변방고을에서 마주한 의외의 꽃담이어서 시선을 뗄 수 없다. 우선 밑단은 막돌을 면회하여 4줄 쌓은 뒤 암키와 파편으로 13줄 점선 줄무늬를 내고 담 가운데에 수키와 4개를 활용하여 원을 그렸다.

다시 원안에 암키와를 이용 수평무늬로 원을 가르고 위아래에 수직무늬 3개를 세웠다. 그리고 위에 점 두 개를 아래에 점 네 개를 찍어 넣었다. 수키와의 곡선과 암키와의 직선, 점을 활용한 기하무늬다. 벽초에 대한 흐릿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이집 꽃담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원은 하늘이고 점은 별이라 하면 잔잔한 물 위에서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노를 저으며 떠나가는 배 같다. 세상 밖은 너무나 잠잠한데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매몰돼 한 하늘아래 서로 창을 겨누며 허우적대는 군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밝혀낼 재간이 없어 생각은 꼬리를 물어 동그라미 안 세로 창살에 갇혀 버렸다.
  
▲ 홍범식고가 꽃담 곡선과 직선, 점을 활용한 기하무늬 꽃담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보은 법주사 선희궁원당 꽃담과 거의 흡사하나 이는 기존의 관념으로 해석한 것일 뿐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 김정봉
 
신영복 선생은 '변방은 기존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와 창조의 공간'이라 했다. 중심부의 틀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애당초 해석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위안을 얻는다. 꽃담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상태다. 다만 담을 포함하여 이 집을 복원할 때 원형을 살렸다고 하는 문화해설사 할아버지의 말에 안도하며 시들어 죽지 않는, 말하지 않는 것과 오랜 대화를 나누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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