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 은퇴 후엔 매춘부로 산다..이 굴레 벗고 MBA 따낸 그녀

전수진 2022. 7. 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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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한 자산관리 회사엔 조금 특이한 경력의 신입사원이 있다. 주인공은 차니라 바즈라차리야(26). 평범해 보이는 이 여성은 어린 시절 중 10년을 여신(女神)으로 살았다. 네팔엔 5세가량 여아 중 특정 조건에 맞는 아이를 선발해 ‘쿠마리’라고 부르며 살아있는 여신으로 추앙하는 제도가 있는데, 그가 바로 그 쿠마리였다. 쿠마리는 이곳 언어의 뜻에 따르면 ‘동정녀’와 비슷한 맥락이다. 해당 여아가 생리를 시작하면 쿠마리에서 강제 은퇴 당한다. 14세기부터 쿠마리 명맥은 이어져 왔다.

어린 여신, '쿠마리' 시절의 차니라 바즈라차리야. [Instagram]


쿠마리가 되는 과정은 퍽 까다롭다. 몸에 상처가 없어야 하고, 특정 가문 출신이어야 하는 등이다. 힌두교 및 밀교의 여신이 세상에 현신한 것으로 추앙받는 존재이지만 아동 착취라고 비판도 받는다. 쿠마리가 되면 무표정을 유지해야 하고 직접 걸어서도 안 되기에 이동할 때도 어른이 업어주거나 가마를 타야 한다. 아무런 일도 해선 안 된다. 과거 이런 원칙들이 더 엄격히 지켜졌을 당시 쿠마리들은 학교도 갈 수 없었고, 운동 부족 때문에 근육이 발달하지 못해 은퇴 후 여러 고충을 겪었다. 그러나 바즈라차리야의 경우는 달랐다.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15일(현지시간) 주말판에서 그의 이야기를 소상히 다뤘다.

카트만드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던 날의 바즈라차리야. [차니라 바즈라차리야 Instagram]

그는 쿠마리 중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NYT는 “바즈라차리야 양이 쿠마리였던 2001년, 그가 나흘 동안 눈물을 계속 흘린 적이 있었는데 그 마지막 날, 네팔 왕족들 사이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며 “나라의 비극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그는 더욱 추앙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NYT에 “쿠마리로서의 삶은 내게는 꽤나 행복한 시간이었다”며 “사람들이 나를 숭배해주고 나에게 항상 꽃이며 현금, 과자 등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전(前) 여신, 자산관리사 바즈라치라야. [차니라 바즈라차리야 Instagram]


그러나 그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은 당사자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쿠마리들의 경우 은퇴 후엔 비극적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쿠마리였던 딸과 함께 살면 불운이 따른다는 미신도 있는 데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성매매로 생계를 잇거나 마약에 빠지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그러나 바즈라차리야는 달랐다. 그는 학교에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쿠마리로 은퇴한 뒤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네팔의 대표적 명문인 카트만두대학교에 진학해 최근 경영학석사(MBA)를 취득했다. 그는 “쿠마리였던 시절엔 ‘어찌 감히 여신님을 가르치려 들겠느냐’고 했지만 그래도 학교에 꿋꿋이 갔다”며 “쿠마리 이후의 삶을 위해선 교육이 필수라고 주변을 설득했다”고 NYT에 말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쿠마리 시절의 바즈라차리야. [차니라 바즈라차리야 Instagram]


그의 부모는 딸의 뜻을 존중했다. 그의 부모는 NYT에 “여전히 쿠마리 출신 여성과 결혼하면 불행해진다는 미신이 있어서 혼담은 덜 들어온다”면서도 딸이 MBA 취득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바즈라차리야 씨는 인스타그램에 아버지가 어린 시절의 쿠마리였던 자신을 안고 있는 사진을 최근 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누구나 부모의 사랑은 필요하다. 여신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여신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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